저기 잘 차려입은 한 노인이 보인다. 작은 체구에 까만 얼굴.조지프 슘페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진을 주머니에 넣는다.

얼핏 보니 두 번째 부인인 안나의 사진이다. 결혼 1년 만에 사별한 안나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슘페터는 세 번 결혼했다).경제학의 대가라 왠지 주눅이 든다.

조심스럽게 최근 경제상황에 대해 우선 질문을 던졌다. 10여개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비상했던 머리는 여전했다.

그는 우선 최근의 경기침체를 지나치게 우려하지 말라고 했다. 위기는 자본주의에서 거치는 당연한 과정인 만큼 장기적으론 약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기업가'의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느냐 여부는 결국 기업가에 달렸다"면서….

#시장은 위기를 먹고 성장한다

슘페터가 가장 아꼈던 제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은 자신의 스승에 대해 "대세를 따르기 싫어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당시 주류 경제학에 맞서 '혁신기업가'라는 키워드를 제시한 것도 그의 이런 성격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사람들은 슘페터하면 '혁신'과 '기업가'라는 두 단어를 떠올립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주신다면.

"'경제발전의 이론'과 '경기순환론'이라는 책에 다 써놨는데.요즘 사람들은 너무 책을 잘 안 읽는단 말야.아무튼 혁신이란 기존의 자원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합해 질이 더 좋고 비용이 덜 드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칭하는 말이지.약간 멋을 부려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고 표현했는데 괜찮지?"

▶이 혁신을 담당하는 주체가 바로 기업가라는 말씀이지요.

"그래도 들은 건 있는 모양이군.정태적 경제의 순환만을 쳇바퀴처럼 돌고 있는 상황에서 정태적 균형을 깨뜨리고 동태적 진화를 촉발하는 것은 다름아닌 혁신적인 기업가라네.이들이 '돈키호테'처럼 나타나 진화를 이끄는 거지."

기업가정신-돈키호테 같은기업가의 영웅ㆍ독창적노력이 자본주의사회 富의 원천

▶선생님의 말씀은 얼핏 '엘리트 주의'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보이는데요.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귀족학교에서 다녀서 그렇다는 둥 말이 많았던 게 사실이야.하지만 잘 보라고.자본주의는 원래 그렇게 굴러가는거야.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원천은 개별 기업가들의 영웅적인 노력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고 봐야 해.헨리 포드,빌 게이츠,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이 악조건과 싸워 독창적인 기술을 성공적인 상업화로 연결시켰을 때 새로운 부가 창출되는걸 봐 왔잖아.자네 나라의 이건희 회장이라는 분이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며 강조한 '천재론'도 아마 같은 맥락일걸."

슘페터에게 케인스는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케인스가 '뉴딜정책'으로 인해 스타 반열에 올랐을때 하버드대 교수였던 슘페터는 학생들로부터 외면받았다. 학생들은 영 희망이 없다고 표현할 때 '슘페터 같은(schumpy)'이라는 신조어를 쓰기도 했다.

▶현재 세계 각국은 앞다퉈 '신 뉴딜정책'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케인스가 다시 부활하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올바른 해법일까요.

"나는 그 인간(케인스)이 계속 사고칠 줄 알았어.1930년대 대공황 시절을 돌이켜 보자고.1930년대 대부분의 국가는 강력한 시장 규제에서 치료방법을 찾았어.국가가 거래를 제한하고 가격과 생산을 통제했지.미국은 뉴딜 정책을 통해 경제의 상당 부분을 국가로 흡수해 버리기까지 했어.케인스학파들은 뉴딜정책이 미국을 수렁에서 구했다고 평가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아.그 당시 공공부문의 득세로 민간부문이 활력을 잃으면서 미국의 실업률이 15%를 넘어섰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네."

▶아무리 그래도 요즘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데요.

"물론 큰 불황이 닥쳤을 때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는 목적으로 정부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다만 '항구적인 엔진'으로서 정부 지출의 필요성은 인정하기 힘들어.대규모 정부지출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누적된 재정적자와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 등이 대표적인 사례지."

▶그렇지만 1990년대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각국 정부의 공적자금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따지고 드는 건 미국 기자나 한국 기자나 똑같구먼.자네 말이 맞아.한국도 그랬지 아마.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은행을 사실상 '국유화'했고 이를 통해 위기를 넘어섰지.

하지만 그 다음이 미국의 대공황 시대와는 달랐지.급한 불을 끈 뒤에는 정부가 개입을 자제했어.오히려 변동환율제를 도입하고 민간영역을 확대했잖아.위기를 겪은 뒤 성장력이 급속히 회복된 것은 시장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됐기 때문이야."

창조적 파괴-뉴딜이 미국 구했다고? 천만에! 정부 간섭은 가능한 줄이고 기업이 뛰어놀 무대 만들어줘야

▶미국이 사실상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망해가는 자동차산업을 살리려 하고 있는데요.

"거듭 말하지만 시장에서 '창조적 파괴'의 바람이 불도록 허용해야만 발전이 있는 거야.사멸하는 기업으로부터 새로운 영역으로 자본이 막힘없이 이동할 수 있어야 미래의 생산성을 끌어 올릴 수 있거든.

그리고 자국산업에 대한 보조금은 결국 보호무역주의로 흐르게 될 우려도 높아.1930년 미국 후버 대통령이 미국 경제학자 1000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인 관세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잘 알잖아.결국 이 법안은 대공황을 세계로 확산시켰고 2차대전의 씨앗까지 뿌렸다네."

슘페터가 활동하던 시절 대부분 경제학자들은 '독점'에 경기(驚氣)를 일으켰다. 자원배분을 왜곡하는 원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슘페터는 달랐다. 오히려 '대기업'을 옹호하는 입장을 곧잘 피력했다. '창조적 파괴'를 일으킬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양극단으로 갈리고 있습니다. 가장 취직하고 싶어하는 직장인 동시에 사회정의에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만.

"물론 비난받을 만한 기업가도 많은 게 사실이지.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대기업의 업적은 여왕들에게 더 많은 실크스타킹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야.그것은 오히려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점점 더 노력을 적게 기울여도 그 대가로 실크스타킹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지.대기업은 발전의 엔진이야.엔진없이 차가 굴러갈 수 있겠나. "

▶그런 식으로 대기업을 옹호하다보면 자칫 독점의 문제를 야기할텐데요.

"자네 나라에 KT라는 회사 있지? 한때 유선시장을 독점했잖아.근데 요즘 어떻게 됐어? 무선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통신시장 구도가 완전히 바뀌었잖아?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옛기술을 가진 기업의 독점적 이윤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봐야 해.그게 순리야.그런 걸 모르고선 얘기가 안 돼."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결혼을 세 번이나 하셨는데 무슨 특별한 문제라도….

"인생상담을 하려면 다른 사람을 찾아 갔어야지.아무튼 여자마음을 헤아리는 게 자본주의 속성을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더라고.최소한 나한테는…."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 조지프 슘페터는 누구인가

조지프 슘페터는 '방랑자'였다. 현재의 체코 지역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빈에서 귀족학교인 '테레지아눔'을 졸업했다. 영국 프랑스 이집트 등을 돌아 미국 하버드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학문영역도 한 군데 머무르지 않았다.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을 넘나들며 다채로운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직업도 다양했다. 변호사로 출발해 이집트의 재정고문을 했다. 이성교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세 번 했고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이 두드러졌다. 23세에 대학교수가 됐고 36세에 재무장관이 됐다. 슘페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경제발전의 이론'이라는 책도 27세에 집필했다.

슘페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창조적 파괴'는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 넣었다. '지식경제학 미스터리'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워시는 "경제학 용어 중에서 최고의 예술로 꼽히는 것은 단연 '보이지 않는 손'이지만 슘페터가 만들어 낸 '창조적 파괴'도 그 뒤를 이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고 평가했다.

슘페터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1883년생 동갑인 케인스와 슘페터는 줄곧 라이벌로 활동했다. 케인스는 당대에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반면 슘페터는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슘페터는 자신의 이론을 단지 서술적으로만 표현했을 뿐 엄밀한 수학적 형태로 증명해 내지는 못했다. 명징한 수리적 표현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케인스에 비해 푸대접을 받은 주 요인이다. 그러나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통찰력만은 어느 누구보다 높게 평가받는다. 슘페터 사후 50년이었던 200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세계화라는 거친 바다의 가장 바람직한 길잡이는 케인스가 아니라 슘페터"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연보

△1883년,오스트리아 · 헝가리제국 모라비아지방(현 체코) 출생△1906년,오스트리아 체르노비츠 대학 교수
△1912년,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 교수
△1920년,오스트리아 재무장관
△1921년,오스트리아 비더만은행 총재
△1925년,독일 본 대학 교수
△1932년,미국 하버드대학 교수
△1950년,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사망

◆도움말 주신분=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이택면 한국여성정책개발원 연구위원,박형철 머서코리아 대표(경영학 박사)
◆참고문헌=경제발전의 이론(조지프 슘페터 저/박영호 옮김),슘페터(이택면 저),조지프 슘페터(이토 마쓰하루 · 네이 마사히로 저/ 민성원 옮김),부의 기원(에릭 바인하커 저/안현실 · 정성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