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22개월간 진행된 미 대선은 첫 흑인대통령 탄생이라는 기념비적인 정치적 사건을 남긴 채 4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론의 여지없이 이번 대선이 남긴 가장 큰 울림은 40대의 흑인 상원의원(초선) 버락 오바마가 슈퍼파워 미합중국의 대통령에 등극했다는 점이다.

그 울림은 변화를 넘어 혁명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여기에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공화당 새라 페일린 부통령후보(알래스카 주지사)로 상징되는 여성 정치인들의 맹활약, 높은 투표율에서 드러난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고조 등도 간과할 수 없는 수확이다.

그러나 2년에 가까운 오랜 대선경쟁에서 기인한 고비용 정치구조, 현직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 현상, 네거티브 선거전에 따른 국론분열, 연안과 내륙지역간 이념적 양극화 현상 등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로 볼 수 있다.

◇인종문제 극복한 흑인대통령 탄생 =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미합중국이 건국 232년만에 배출한 흑인대통령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와스프(WASP.앵글로 색슨계 백인 개신교자)가 주류사회를 형성하며 이끌어온 미국사회가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불과 50년전만해도 흑인에 대한 공공연한 격리와 시민권 제한이 당연시됐던 점을 생각하면 미국 사회는 유색인종 대통령을 최고지도자로 받아들일 정도로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내 소수인종으로 머물러 있는 흑인들의 지위향상은 물론 아시아계 이주민 등 기타 소수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인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따라서 오바마의 대선승리는 비단 정치적인 의미에서뿐만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더 나아가서는 인류학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사건으로 역사 속에 자리매김할만하다.

◇여성정치인 활약 = "나는 유리천장에 1천800만개의 금을 가게 만들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1천800만표를 득표하고도 석패한 힐러리 클린턴이 여성 정치인에게 가로놓여있는 높은 벽을 깨부수지는 못했지만 미래의 여성정치인들이 손쉽게 벽을 허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놨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힐러리의 대선경선은 그만큼 강렬했고, 인상적이었다.

남성 정치인들이 지배하는 워싱턴 정치에서 들러리이기를 거부하고 대선가도를 폭풍처럼 질주했던 힐러리는 지금까지 미국의 여성정치인 가운데 대권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힐러리가 없었다면 `대통령 오바마'는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역시 힐러리가 아니었다면 `부통령 후보 페일린'도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명의 40대 알래스카 주지사인 페일린은 정치식견과 세계관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2012년을 기약할 수 있는 공화당의 기대주로 훌쩍 성장했다.

힐러리가 금을 가게 한 유리천장을 박살낼 여성 정치인으로 현 시점에서 페일린이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성 정치인의 진화(進化), 그것은 인종의 벽을 뛰어넘은 오바마의 대권승전사와 함께 이번 대선이 `마이너리티'에 남긴 값진 선물이다.

◇무관심 정치서 `참여정치'로 = 오바마-힐러리 흥행카드와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경제위기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었던 미국인들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모았다.

이번 대선의 등록유권자는 1억8천400만명. 4년전 대선의 1억4천300만명과 비교해 무려 28%가 늘어난 수치다.

조금 부풀려 말하면 한국의 유권자 인구에 버금가는 새로운 유권자가 생겨난 셈이다.

인종적, 성적, 연령적 소수자에 해당하는 흑인, 여성, 청년표가 늘어난 점도 주목할만 하다.

이는 국민이 직접 참여해 대선후보를 결정하겠다는 욕구가 그만큼 커졌음을 반증한다.

유권자로 등록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겠다는 뜻이다.

기나긴 투표행렬에도 불구하고 3천만명에 가까운 유권자들이 조기투표에 참여한 것도 이런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특히 민주당의 신규 유권자가 대폭 늘어난 점은 오바마의 당선에 큰 원동력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민주당은 이런 현상이 민주당의 `장기집권'에 밑거름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고비용 정치구조 = 미 대선은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전형적인 `고비용' 정치구조의 결정판이다.
민주. 공화 양당의 당내 대권경선은 차치하고 오바마, 매케인 후보가 대권구도 확정후인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지출한 선거비용은 4억2천만달러에 달한다.

미 연방선거위원회(FEC) 조사에 따르면 오바마가 3억1천990만달러, 매케인이 1억4천750만달러를 썼다.
오바마는 특히 `공중전'에 해당하는 선거방송과 광고에 전체 선거비용의 70% 이상인 2척3천300만달러를 사용했고, 매케인은 6천970만달러(47.2%)를 전파를 통해 날려버렸다.

오바마가 대선일을 불과 엿새 앞둔 지난달 29일 황금시간대에 300만-400만 달러로 추정되는 30분짜리 단발성 TV광고를 내보낸 것은 선거자금 동원력이 당락에도 상당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오바마의 초대형 TV광고에 대해 "서민들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광고를 하는 것은 대선승리에만 집착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오바마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도입된 연방선거보조금 수령을 거부한 채 300만명 이상의 개미후원금으로 대권에 임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이번 대선이 고비용 구조로 흐를 수밖에 없는 원인(遠因)을 제공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역적 이념양극화.국론분열 = 미 대선지도를 보면 연안과 내륙지역의 대선후보 지지성향이 확연하게 갈린다.

오바마는 동부와 서부의 연안에 파랑색(민주당 대표색) 깃발을 꽂으며 대세를 장악한 반면 매케인은 지리적으로 중원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선거인단이 많이 몰려있는 연안지역 공략에 실패, 대권고지에 오르지 못했다.
오바마가 선거종반 대세론에 힘입어 일부 중원공략에 성공했지만, 미국의 이념적 지도는 여전히 고착된 지역 패러다임을 깨진 못한 양상이다.

대선레이스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민주와 공화 양당이 네거티브 공세에 의존, 국론분열의 양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선거 종반 경제위기의 쓰나미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매케인은 오바마의 감세정책을 겨냥해 `부(富)의 재분배'를 선동하는 `계급투쟁'이라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오바마를 극좌파 성향의 인사와 연결시키려는 네거티브 전략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매케인이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90%가까운 지지를 보냈다며 `부시=매케인' 동일화 전략으로 매케인의 역전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특히 오바마 진영은 공화당 페일린 부통령 후보를 `함량미달자'로 규정했으며, `돼지 입술에 립스틱' 발언 등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 = 이번 대통령 선거는 지난 2007년 1월 민주, 공화 양당 대선예비주자들의 연이은 출마선언을 신호탄으로 22개월 대장정의 테이프를 끊었다.

대선레이스가 달궈지면서 집권2기의 임기를 절반이나 남겨놨던 조지 부시 대통령의 존재감은 왜소화하기 시작했으며,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급속히 대선주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맞춰졌다.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하고 있는 규정에 따라 2번째 임기를 끝내는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말 권력누수가 어떤 측면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미국의 정치현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경우에는 장기화되고 있는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더욱 제한된 점이 있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수준인 25% 안팎의 저공비행을 계속한 것은 단순히 그가 물러날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집권 8년의 실정이 여론에 투영된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워싱턴연합뉴스) 고승일 특파원 ks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