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저지주 버겐 카운티에 사는 이모씨(55)는 엊그제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로부터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들었다.

함께 TV로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보던 중이었다.

"범인인 조승희씨가 외톨이였다"는 언급이 나오자 아들이 "이해할 수도 있다"며 "중·고등학교 때 괜스레 학교를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많았다"고 털어놓은 것.

이씨는 14년 전인 1993년 이민왔다.

오로지 자식 교육을 위해서 한국의 그럴 듯한 직장도 때려 치웠다.

미국에 오자마자 세탁소를 냈다.

일의 성격상 부부가 교대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부부는 열심히 일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아이들도 무난히 미국생활에 적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로부터 생각지 못한 말을 듣자 이씨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에 온 아들이 털어놓은 첫 번째 고충은 외롭다는 거였다.

말은 안 통하지,부모는 바쁘지,친구는 없지.두 번째는 가정문화와 학교문화가 판이한 문화적 갈등이었다.

여전히 유교적 예절을 강요하고 성적과 일류대 진학을 절대 우선시하는 부모님과 사회성 및 자율성을 강조하는 학교 사이에서 학창시절 내내 갈등을 겪어야 했다.

철이 들고서는 정체성 정립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미국인인 것 같기도 하고,어떻게 보면 한국인인 것 같기도 한 경계선에서 혼란을 겪었다는 것.이런 정체성 혼란은 대학원에 다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게 아들의 설명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온 이른바 1.5세대들은 대부분 이씨 아들과 같은 혼란을 겪는다.

특히 30여년 전 이민온 1.5세대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부모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자랐다.

가정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가정의 실종은 곧 자식의 방치를 의미했다.

술과 담배,그리고 마약에 빠져드는 아이들도 상당했다.

최근 들어서는 사정이 나아졌다.

이씨처럼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이민오면서 자식들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모 생각일 뿐이다.

자식들에게 부모는 여전히 바쁜 사람들이다.

정작 필요할 때는 없다.

오히려 툭하면 "성적이 이게 뭐냐"라거나,"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는데 그럴 수 있느냐"는 호통만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

뉴욕이나 LA 등 대도시의 PC방 등에 한국 청소년들이 밤늦게까지 진을 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심할 경우 조승희씨처럼 외부와 철저히 담을 쌓은 채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경우도 나타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민온 김태형씨(30)는 "한창 예민한 시기인 중·고등학교 때 잘못된 길로 빠지느냐,갈등을 극복하느냐는 백지장 한 장 차이"라며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돌아봤다.

뉴욕에서 헤드헌터사인 HR Cap을 운영하는 김성수 사장(48)은 요즘 자다가도 입이 벌어진다.

딸이 명문 프린스턴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김 사장에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딸이 지금까지는 잘해 왔지만 어느 순간 인종적 한계를 느끼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명문 대학을 나온 한인 1.5세대들이 '유리천장'(직장에서 여성들의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과 비슷한 인종적 한계를 느끼며 좌절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교민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박태민씨(32)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민온 박씨는 시카고대를 나와 뉴욕대 MBA를 마쳤다.

그가 처음 취직한 곳은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리먼 브러더스.그러나 3년 만에 그만두었다.

능력의 한계도 느꼈거니와 인종에 따른 벽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인회사를 찾았고 그때부터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모두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고 달려들지만 메릴린치의 김도우 사장처럼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몇 사람을 빼고는 유명 미국 회사에서 성공하는 1.5세는 드물다"며 "이들은 결국 나는 한국인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해서야 정체성의 방황을 끝낸다"고 말했다.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에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부모를 따라 어릴 때 이주해온 1.5세대들.몸은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은 미국인인 그들.그래서 한국인이자 미국인인 그들이지만 역으로 한국인도,미국인도 아닌 주변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 이민 1세대,1.5세대,2세대=어느 시기에 이민왔느냐에 따라 구분하는 호칭.

한국에서 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란 뒤 이민온 사람들을 1세대라고 부른다.

몸은 미국에서 일하지만 한국인이라는 가치관이 뚜렷하다.

1.5세대는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이민온 사람들이다.

몸은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은 미국인이다.

가장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세대다.

2세대는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법적으로도 미국 시민권자이고 사고방식도 미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