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째 지속되고 있는 프랑스 소요사태는 이민자 주택단지에서 자라난 이민 2세대들이 사회진출 기회부족으로 소외감을 느끼게 됨으로써 발생했다고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이 9일 보도했다. 신문은 이민자들이 일정 지역에서 수십년간 거주하면서 이민 2세들은 프랑스 주류사회로부터의 소외감을 느끼게 됐으며 이러한 소외감에다 경찰의 태도, 무슬림에 대한 사갈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번 소요가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민자 주택단지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60년대에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됐다. 이에 따라 프랑스 여러 지역의 낡은 주택에 살던 이민자들은 잔디밭과 운동장, 사교시설 등으로 들러싸인 작지만 현대적인 아파트로 이주하게 됐다. 이민자들은 당시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이민자 거주대책은 성공하는 듯했다. 근로자들인 이민자들은 근로자 계층인 프랑스인들과 이웃해 살게 됐고 자녀 교육은 무료로 할 수 있었다. 자녀들은 프랑스 공화국의 이념을 배우며 자유와 형제애, 평등을 누리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 스스로 느끼는 것일 뿐이었다. 30년전 모로코에서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온 하산 마로우니(38)는 "ID카드에도 프랑스인으로 돼 있고 세금도 내고 군대도 갈 수 있으며 다른 점은 아랍인이란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형태의 주택단지는 1980년대에 들어 정부 지원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 시행됨에 따라 대부분의 프랑스인 근로자들은 주택단지를 떠났으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 그대로 눌러앉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민자들이 압도적인 다수가 된 주택단지가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성인의 나이에 도달한 이민 2세대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가 본토박이 프랑스인 친구들이 누리는 것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에 따른 불만은 청소년 범죄 빈발로 이어졌고 경찰의 진압도 잇따랐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비록 소규모지만 현재의 소요와 유사한 성격의 폭동이 1983년 여름에 일어났다. 폭동에 이어 리용과 파리 교외의 이민자 거주지역에선 평등권 요구행진이 벌어져 언론의 주목과 함께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수와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일부 행진을 벌인 이들을 엘리제궁으로 초대, 뭔가 획기적인 대책이 마련될 듯했다. 그러나 그후 이뤄진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주택단지들이 새로 색칠됐고 고장난 승강기들은 고쳐졌으며 사회복지사들이 이민 1세대들을 돕도록 배치됐다. 정부는 행진 주도자인 데시르가 차별반대 단체를 설립토록 허가했다. 이후 주택단지 문제 해결에 대한 실망과 주류사회의 차별이 심해짐에 따라 서부 및 북부 아프리카계 청소년들이 뭉치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번 소요로 이어졌다. 데시르는 "이번 소요는 분노의 표출과 지원 요청을 의미한다"며 "정부는 사람들이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경찰에게서 정당한 대접을 받으며 주택단지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유창엽 기자 yct9423@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