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가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즉시 잡아 처형하겠다고 공언했던 옛 소련의 풍자 만화가 보리스 예피모프는 그로부터6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살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104세의 나이로 시력도 흐려지고 귀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아마도 세계 최고령일 이 풍자화가의 손은 아직도 매일 스케치를 할 만큼 힘이 있다. 지난 달 28일 104회 생일을 맞은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빛나는재능과 깊이, 유머와 지혜"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볼셰비키 혁명으로부터 2차대전을 거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대부분의 세월을 예피모프는 대중에게 사악한 적의 이미지를각인시키고 자본주의 사회는 궁극적으로 멸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분에 충실했다. 나치독일 시절에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히틀러를 미치광이 괴물로 그려냈고냉전시대에는 미사일을 휘두르는 고약스런 외모의 엉클 샘으로 미국을 묘사하는 등소련의 이념적 적들을 그림으로 난도질해 외교 분쟁을 빚기도 했다. 모스크바 강변의 아파트에서 책과 앨범, 사진 등 자신의 과거와 함께 살고 있는그는 "나의 작품은 본질적으로는 무기였다. 만화는 혹독하게 비판하고 날카롭게 찌르며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조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재미삼아 그림을 그리지만 요즘 러시아 사회는 만평 대상이아니라고 생각해 정치만화는 그리지 않는다. 예피모프는 "요즘 러시아에서 청부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있겠는가? 매일 기업인, 공직자들이 살해되고 있는 현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처럼 끔찍한 현실은 도저히 유머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유대인인 그는 2차대전 중 거의 매일 히틀러를 조롱하는 만화를 그렸다.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즉시 자신의 처형을 명령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그래도 스탈린의 얼굴과 맞대면하기보다는 화난 히틀러에게 대드는 편이 낫다"고 대답했다. 전쟁 후에는 윈스턴 처칠이 단골로 도마에 올랐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이빨까지 무장한" 존재로 그려졌다. 스탈린의 혁명동지이자 경쟁자였던 레온 트로츠키와 친구 사이였던 예피모프는1928년 트로츠키가 중앙아시아로 망명하기 전날 그와 만났던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내가 트로츠키에게 `정치에서 손을 떼고 쉬면 사정이 좋아질거야'라고 말했더니 그는 `나는 정치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어. 자네도 마찬가지일거야. 자네는계속 그림을 그리게 될 거야'라고 말하더라"고 회고했다. 트로츠키의 말대로 두 사람은 사이좋게 헤어졌지만 결국 예피모프는 스탈린의명령에 따라 트로츠키를 조롱하는 만화를 그려야만 했고 이 일은 그의 마음을 지금까지 무겁게 하고 있다.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던 트로츠키는 결국 1940년 스탈린의 추종자에게 암살됐다. 100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를 유령까지 따라다니는 것은 트로츠키 뿐만이 아니다. 그의 친형이자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기자였던 미하일 콜초프는 1938년대숙청때 검거돼 종적이 묘연했으나 고문 끝에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예피모프는 지식인 대숙청 당시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자신의 재능을 쓸모있게여겼던 스탈린이 살려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의 나머지 목숨을 살고 있다"고 자신의 장수를 설명하면서도 다른 수백만명의 지식인처럼 침묵을 지킨 대가로 살아 남았고 때로는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조롱해야만 했던 과거를 슬프게 생각하고 있다. (모스크바 로이터=연합뉴스) youngn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