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점령당한 이라크에서 가치관 충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파는 미군 군화발에 실려 무섭게 밀려 들어오는 변화의 물결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힘이 부쳐 보인다.

이라크 땅에서도 총구(銃口)와 자본을 앞세워 서구적 체제로의 변신을 강요하는 미국의 힘에 못이겨 1천300년간 명맥이 이어져 온 이슬람적 가치관이 눈에 띄게 희석돼 갈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법원(法源) 논란= 이라크 헌법이 내년 제정될 때까지 과도헌법으로 기능할 기본법(Basic law)의 구체적 제정방향을 놓고 미 군정당국과 이슬람 보수파가 충돌하고 있다.

양측간의 충돌은 이라크 임시 정부가 출범해 주권을 넘겨받기 전까지는 행정수반 역할을 하는 폴 브리머 미 군정 최고행정관의 기본법안 거부권 발언으로 표면화됐다.

브리머의 발언은 기본법의 토대, 즉 법원(法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 16일 카르발라의 한 여성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라크 지도자들이 이슬람 율법, 즉 샤리아를 기본법의 토대로 삼으려 할 경우 절대 수용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일부 과도통치위원들은 샤리아를 유일무이한 법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터라 브리머의 이날 발언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브리머가 문제삼은 샤리아의 내용은 여성의 이혼청구권을 제한하고 일부다처제와 조혼(早婚)을 인정하는 등 서구적 시각으로 볼때 양성(兩性) 평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하원 의원 45명이 이달 초 이라크 여성의 권리 보호를 촉구하는 서한을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등 이슬람 성직자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일만한 여성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수니파 지도자로 과도통치위 순번제(2월) 의장을 맡고 있는 모흐센 압델-하미드는 이슬람 율법이 과도헌법의 핵심 토대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등 이슬람 지도자들은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특히 이라크 시아파 최고기구인 이슬람혁명최고위원회(SCIRI)를 이끄는 핵심인물 중 한사람인 사드랄딘 알-쿠반지는 "샤리아를 토대로 한 기본법안을 브리머가 거부해선 안된다"며 "어떠한 외세적 견해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이라크인들이 싫어하는 가치를 억지로 주입시키려 한다면 정치적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밝혀 이달 중 확정돼 내달부터 시행될 기본법을 둘러싼 충돌이 분출될 가능성을 예고했다.

◆물리적 충돌 가시화=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후 미국발(發) 훈풍을 타고 이라크에 퍼지고 있는 주류점과 비디오점 등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타격목표가 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아랍어 일간 아자만의 17일 보도에 따르면 북부 모술의 알주르 거리에 위치한 대형 주류점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행인 1명이 부상하고 인근의 상점과 주택들이 크게 파손됐다.

또 일본 자위대 병력이 배치된 사마와에서는 이날 포르노 비디오를 밀매온 것으로 알려진 비디오가게에 대한 폭탄테러가 있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마와에서는 이런 테러가 최근 한달 사이 2차례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랍위성 방송 알-자지라는 후세인 축출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시아파가 득세하면서 바스라에서는 세속적이란 이유로 음악공연장과 클럽이 폐쇄되고 음악인들이 위협을 받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지 소식통들은 주류점 등을 상대로 한 공격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엄격한 도덕률을 강조하는 이슬람적 가치를 훼손하려는 서구세력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샤리아는= 미 군정은 샤리아(sharia)가 과도헌법의 핵심토대가 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법원(a primary source)중의 하나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이슬람을 국교로 삼았던 이라크를 지탱해 온 기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샤리아는 사전적으로 `물 마시는 곳으로 이끄는 길,' `진리 또는 하나님(알라)에게 다가가는 길'이란 뜻을 갖지만 통상 이슬람법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샤리아는 `법'이라기 보다는 법률이나 법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규정과 원칙, 그리고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샤리아는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에게 계시된 신의 말씀인 꾸란(코란), 무함마드의 말과 행적을 기록한 순나, 이슬람 공동체의 합의를 나타내는 이즈마, 유추를 통한 추론법을 의미하는 퀴야스를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이슬람법하에서는 모든 행위에 대한 선악판단은 꾸란에 의하고, 꾸란에 명문화가 돼 있지 않으면 순나, 순나에도 해당규범이 없으면 이즈마, 이즈마로도 안되면 퀴야스에 호소하게 된다.

샤리아의 내용은 목욕, 예배, 순례, 장례 등에 관한 의례 규범에서부터 혼인, 상속, 계약, 소송 및 비(非) 이슬람교도의 권리와 의무, 범죄, 형벌, 전쟁 등 법적 규범을 망라한다.

이슬람 전문가인 지아우딘 사르다르는 자신의 저서에서 "샤리아는 개개인, 사회, 공동체, 국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권리를 누리고 책임을 나눠야 한다고 강조한다"며 "샤리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정의를 강조함으로 써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바그다드=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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