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0월2일 멕시코시티 틀랄텔롤코광장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당시 정부 명령을 받는 최소한 360명의 저격수들이 현장에 배치돼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는 정부 기밀문서가 공개됐다. 이는 무장 시위대가 먼저 경찰에 발포해 유혈사태를 촉발했다는 과거 정부 공식발표와는 달리, 정부 당국이 무리한 작전으로 대학살 사태를 초래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동안 이 사태에 대해 희생자 유족이나 인권단체들은 당시 최고위층의명령을 받은 진압경찰과 군당국의 고의적인 학살극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른바 `10.2 틀랄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 35주년을 하루 앞둔 1일(현지시간)현지 언론이 입수한 정부 기밀문서에 따르면, 시위가 벌어졌던 틀랄텔롤코 광장 인근 건물의 창과 창 사이를 기민하게 움직이던 저격수들 가운데 일부는 루이스 에체베리아 당시 내무장관의 가까운 가족이 소유한 아파트에 배치됐다. 공개된 공문서에는 관련된 경찰관들과 당시 배치됐던 저격수들의 구체적인 신원이 포함돼 있다. 당시 멕시코 국내치안 문제를 총괄한 에체베리아 전 장관은 시위 진입과 관련해자신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부인해 왔으며, 이번 저격수 배치 문건에 대해서도 그와 측근들은 논평하기를 거부했다. 1970년 대통령에 오른 에체베리아는 `10.2 학살' 사건을 담당하는 이그나시오 카리요 특별검사에게 소환돼 조사를 받았을때도 묵비권을 행사하며 증언하지 않았다. 카리요 특별검사팀의 마리아 마그달레노 조사반장은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이자신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집에서 저격수들이 발포한 사실을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별검사팀이 그 동안 밝혀낸 증거 자료에는 당시 틀랄텔롤코 광장에는 수 십개의 군부대와 경찰 진압부대가 동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유혈진압 작전에 대해 당시 정부 고위관리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특별검사팀은 당시 진압 현장에는 `로스 팔코네스(독수리들)'라는 비밀 경찰특공대 책임자가 있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로스 팔코네스는 71년 6월10일에도 민주화를 요구하던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을 습격해 유혈진압했다. 11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한 이 사건은 `2차 학살극'으로 불린다. 특별검사팀은 1968년 당시 제도혁명당(PRI) 정권이 사전에 경찰에 시위자들을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아직 확보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당시 광장에는 연방경찰을 비롯해, 멕시코시티 경찰청 소속 경찰, 비밀요원 등 다양한 경찰조직이 포진했다는 점을 밝혀냈다. 따라서 정부의 경찰 통제권이 100% 미치지 못함으로써 유혈 사태 책임이 시위대보다는 정부측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틀랄텔롤코 광장 학살사건은 멕시코판 `추악한 전쟁'으로 묘사된다. 이 사건은'68 멕시코 올림픽을 10일 앞두고 대학생과 근로자, 좌익단체들의 반정부 투쟁이 거세질 조짐을 보이자, 같은해 10월2일 연대투쟁을 위해 광장에 모였던 이들에게 경찰과 군이 무차별 총격을 퍼부어 최소한 300명 이상(당시 외신보도)을 살해하고 2천여명을 부상시킨 전대미문의 학살극이다. 당시 PRI 정부는 시위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17명에 불과하다고 축소발표했으며, 언론에 대해서도 관련 사진이나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현재특별검사팀 조사결과로는 당시 38명이 사망했다는 증거가 확보됐으며, 지난해 2월공개된 미국 공문서에는 당시 사망자가 200명이었다고 돼있다. PRI 71년 집권에 종지부를 찍은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2001년 10월 10.2 사건 33주년을 맞아 이 사건을 멕시코 민주화 운동으로 성격을 규정하고 관련 자료를 공개키로 결정했다. 이어 지난해 1월31일 멕시코 연방대법원은 "검찰은 공소시효에 관계 없이 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사건을 재조사할 특별검사가 임명됐으며,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고위관료, 군 고위장성 등을 상대로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돼 왔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김영섭 특파원 kimy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