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과 옛 성(城)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고도(古都) 하이델베르크. 이 도시의 중앙역을 빠져나오면 왼쪽에 사무실과 에스컬레이터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푸른 빛깔의 첨단건물이 보인다. 인쇄기계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하이델베르거 드룩마쉬넨(Heidelberger Druckmaschinen)의 본사다. 이 회사는 올해로 설립된지 1백53년을 맞았다. 전통적인 독일 기업으로 주문형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회사 직원의 60%가 독일에서 일할 만큼 독일내 생산비중이 높다. 기자와 함께 공장을 둘러본 마르틴 치볼트 아시아ㆍ태평양지역 판매담당 이사는 "독일의 노동비용이 비싸지만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주요 부품들을 독일 내에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회사가 최근 독일내 공장 2개를 폐쇄하고 3천2백여명의 직원을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2만4천여명에 달하는 회사 직원중 15%에 해당하는 인력을 감원하겠다는 계획이다. 최근 2분기 연속 적자를 내는 등 회사가 어려워진 탓이다. 뛰어난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로 인정받고 있지만 대량 생산과 저임금을 앞세운 외국 업체들의 저가공세에 밀리고 있어서다. 독일이 자랑하는 화학 부문에서 시장점유율 3위 업체인 데구사(Degussa)는 '노동비용 동결'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임금이 오르는 만큼 파견업체 직원 및 외국인 고용, 조직 축소 등을 통해 인건비 상승률을 0%로 억제한다는 전략이다. 로베르트 비스너 데구사 첨단충진재ㆍ염료부문 사장은 "상당수 공장과 기술 및 연구부서를 이미 해외로 이전했다"며 "고객기업들이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에 (데구사도) 따라나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설명했다. 데구사 직원은 2000년 6만2천9백여명이었으나 2001년에는 5만3천3백여명, 작년에는 4만7천6백여명으로 줄었다. 불과 2년만에 1만5천3백여명이 감원됐다. 독일내 공장을 영국으로 통폐합하는 등 독일내 생산도 축소했다. 자본지출도 지난해 15%나 줄이는 등 긴축경영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해 순이익은 2억2천7백만유로로 전년에 비해 46.1% 감소했다. 독일에서 탄탄한 회사로 알려진 제조업체들조차 고비용 구조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자금 여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은 더욱 어렵다. 독일내 부도기업수는 2000년엔 2만8천2백여곳이었으나 작년에는 3만7천5백여개로 늘어났다. 90년대 초반 부도업체수가 1만여개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세배 이상 늘어났다. 자영업자를 포함한 개인 파산은 지난해 4만6천8백명에 달했다. 부도의 된서리를 맞기 전에 비용을 낮추고 효율은 높일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해외로 둥지를 옮기는 기업들의 행렬이 길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기계 자동차 전자 업체들이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로 공장을 옮겼고, 섬유 생활용품 업체들은 중국 인도 등 아시아 지역으로 앞다퉈 이전하는 중이다.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폭스바겐은 최근 중국에도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에 따르면 독일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액은 2001년 4백70억유로에서 작년 2백61억유로로 줄어들었다. 기업들의 '독일 탈출'에 제동이 걸려서가 아니라,이미 많은 기업들이 빠져나간 탓이라는게 젠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신용ㆍ자본시장부문장의 설명이다. 99년의 경우 작년보다 4배 가까이 많은 1천29억유로어치가 해외직접투자로 나갔다. 공장이 해외로 옮겨나가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폭스바겐이 미니밴(5000?5000모델) 생산공장을 해외에 짓겠다고 하자 금속노조(IG메탈)가 2001년 8월 '35시간 기본근무에 42시간까지 초과근무'를 허용하면서까지 양보해 공장을 독일 내에 짓도록 합의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시 폭스바겐의 근무시간은 주당 28.8시간이었다. 근로조건을 대폭 양보하면서까지 공장을 붙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도 산업 공동화(空洞化)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업설립 자본금 지원제도와 1천여개의 인력양성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옛 동독 지역 6개주에 투자하는 기업에는 총 투자비용의 50%까지 되돌려주는 보조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인츠 키르크호프 베를린 투자개발청 투자유치위원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독일 주(州)정부 간에도 치열해지고 있다"며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싼 옛 동독지역 내에 베를린이 있어 상대적으로 유리한 편"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의 이같은 외국인 투자유치 노력은 그러나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기업들조차 삼성SDI가 동독에 있던 공장을 인수한 것을 제외하면 생산공장이 없다. 물류ㆍ마케팅 등 서비스분야 법인들만 독일에 진출했다.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 들어선 일본 소니센터도 제조업과 관계없는 레저 단지다. 뒤셀도르프 인근 랑겐펠트에 입주한 대우종합기계의 마승록 독일법인장은 "상품전시장과 판매ㆍ서비스 인력으로만 운영하고 있다"며 "생산공장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물건을 팔아먹을 생각만 할 뿐 생산지로 보고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적어도 제조업 분야만을 놓고 보면 독일은 분명 투자 불모지였다. 특별취재반=김호영ㆍ현승윤ㆍ안재석ㆍ김병언 기자 h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