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9일 영국, 스페인과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새 이라크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스스로를 `점령국'(occupying powers)이라고 지칭, 눈길을 끌었다. 미국이 스스로를 점령국으로 자처하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해방군(liberating forces)'이라고 강변해온 그간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행태다. 미국이 이처럼 입장을 바꾼 데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지만 미국의 주도로 전개된 이번 이라크 전쟁을 `침략전쟁'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있는 국제사회 일각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의식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예 점령국임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눈길에서 벗어나그에 걸맞은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심산이라는 풀이다. 이와 관련, 제레미 그린스톡 유엔주재 영국대사는 미국과 영국을 점령국이라고표현함으로써 안보리 이사국들을 "만족시켰다"고 말했다고 영국 BBC 방송은 전했다. 결의안은 "점령국과 (군정)당국은 국제법에 따라 특별한 권한과 책임, 그리고의무를 갖는다"고 규정,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법이 정한 점령국의 지위를 인정하도록 명문화했다. 결의안은 이어 "모든 당사자(all parties)는 1949년 제정된 제네바협약을 비롯한 국제법에 따른 의무를 준수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안보리 회원국들도 미국과 영국의 점령국 지위를 인정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기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점령국은 피점령국에 대해 ▲질서 및 안전 회복 ▲식량과의약품 공급 ▲지원 및 구호활동에 대한 협력 ▲공중보건 및 위생 확보 ▲교육 여건마련 ▲국제적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한 기존 형법의 유지 등의 의무를 지게 된다. 또 ▲약탈 ▲현지인에 대한 점령군 복무 강요 ▲주민 강제 이주 ▲자원 착취 등을 금지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 등이 이날 안보리에 제출한 새 이라크 결의안에는 제네바 협약이 정한 점령국의 이런 의무사항을 충실히 반영, 유엔을 사실상 배제한 채 이라크 통치를 주도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서울=연합뉴스) jusa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