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계기로 독립을 추진하고 있는 이라크내 북부지역의 쿠르드족은 인도-유럽계 혈통으로 그 기원은 고대 페르시아의 메데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일민족국가 `쿠르디스탄' 창설을 오래도록 염원해 왔으면서도 오늘날 2천500만-3천500만으로 추산되는 쿠르드인들은 터키와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 4개 국가의 산악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이들의 절반 가량은 도시 주민들이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들은 아랍민족도, 터키민족도, 페르시아 민족도 아니어서 이들 4개국 모두로부터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오늘날 이라크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 배신을 무릅쓰고 외부 세력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는 터키로 1천300만-1천900만명에 이르며 두번째로 이란이 600만-800만명, 이라크가 400만-500만명, 시리아가 100만-15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레바논, 또는 독일과 같은 유럽국가로 이주했다. 이들의 대다수는 수니파 이슬람 신도이며 일부 고유 종교도 아직 남아있다. 페르시아어와 아르메니아어에 가까운 쿠르드어에는 4개 방언이 있으며 인도-유럽어군에 속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쿠르드인은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군 지도자 살라딘(1137-1193)이다. 그는 살라 알-딘으로도 불린다. 지난 수세기동안 쿠르드족은 여러 개의 반자치 속국 형태로 쿠르드족 왕조가 지배하는 자치시기를 갖기도 했으며 이들 속국중 일부는 19세기 중반 오토만 제국과 페르시아에 의해 전복될 때까지 존속했다. 16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쿠르드족의 민족국가 재건 요구는 수백년동안 이들에게 박해와 차별, 때로는 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항상 가파른 풀밭과 비옥한 계곡이 있는 산악지역을 피란지로 택했지만 현대적 무기가 등장하면서 이같은 험지조차 차지하기가 어려워졌다. 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패배하고 오토만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쿠르드족의 독립 요구는 세브르 협정(1920)을 통해 인정받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세브르협정은 1923년 로잔 협정으로 대체되면서 쿠르드족의 요구는 묻혀버렸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2차대전 말기에 소련의 지원으로 한 때나마 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곧 이란군에 의해 진압됐다. 터키와 시리아 역시 지난 수십년동안 쿠르드족의 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터키는 2002년까지 쿠르드어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쿠르드족' `쿠르드어'라는 단어조차 공식적인 사용이 금지돼 `산악 언어' 로 불렸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총기와 폭격기, 불도저 등을 사용해 쿠르드족 마을과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말살정책을 펼쳐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가던 1988년 4월 이라크 폭격기들은 쿠르드족의 할라비야 마을에 독가스를 살포해 전주민을 몰살했다. 터키에서는 1978년 압둘라 오잘란이 이끄는 쿠르드노동자당(PKK)이 결성돼 1984년 분리운동을 시작해 터키 남동부를 내전 상태로 몰고 갔으나 결국 3만1천여명의 사망자를 낸 채 1999년 진압됐다. 이라크에는 1991년 걸프전 종전과 함께 북위 36도선 이북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됨으로써 사실상 `미니 쿠르디스탄'이 탄생했으나 터키는 자국내 쿠르드인들이 전철을 밟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내 쿠르드족 양대세력인 쿠르드애국동맹(PUK)과 쿠르드민주당(KDP)의 치열한 반목이 내전으로 비화하자 KDP는 이라크군의 힘을 빌어 이란의 지원을 받는 PUK를 몰아 내기도 했다. 이 두 세력간의 분열은 2002년 봉합돼 통합된 이라크내 쿠르드 의회가 모술시에 자리잡았다. 2003년 3월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 후세인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이라크내 쿠르드족은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됐지만 주변의 수많은 적은 물론 내부의 갈등과 분열, 불확실성은 아직도 이들을 위협하고 있다. (키르쿠크 AFP=연합뉴스) youngn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