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아랍권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이라크 최후통첩을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간주, 외교적 위기 해결의 문은 이제 완전히 닫혀버렸으며 전쟁은 불가피한 수순이라는 체념에 빠져있다. 더욱이 이라크 지도부가 예상대로 부시 대통령의 망명 요구를 거부하고 결사항전 의지를 굳힘에 따라12년만에 역내에 전쟁의 망령이 되살아 나고 있다. 아랍 각국 정부와 언론들은 18일 미 행정부의 안하무인식 전쟁 논리에 대해 "3차 대전으로 몰고가려는 히틀러의 부활"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 "카우보이 시대의도래" 등 격한 표현으로 반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이라크 주변 아랍국들은 전쟁 발발시 우려되는 정치, 경제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비상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이 불가피해졌다는 상황 판단에 따라 전쟁의 파장을 분석하고 국가안보 관련 문제 등을 전담할 각료급 비상대책반 구성을 지시했다고 이집트 언론들이 18일 보도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17일 밤 각료급 회의를 주재, 이라크 상황과 유엔안보리 동향을 중점 논의했으며 참석자들은 이라크 위기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소멸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집트로선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중동지역과 이라크 국민들을 구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말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전쟁을 막기위해 이집트가 기울인 최선의 노력으로 아랍정상회담 개최와 이라크 지도부에 대한 꾸준한 설득을 예로 들었다. 이집트 정부는 이와 함께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보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메드하트 하사네인 재무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고위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국무부와 재무부 및 대외원조 관련 부처 관리들을 만나 전쟁발발시 이집트에 긴급 원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집트는 이라크 전쟁이 벌어질 경우, 관광수입과 석유 판매 수입, 수에즈운하통과세, 해외 송출 근로자 송금 등이 줄어들어 100억-14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언론들은 그러나 실제 손실 규모는 전쟁의 지속 기간과 미국의 전쟁 시나리오, 전후 구상 등에 따라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스마일 하산 중앙은행 총재는 이라크 전쟁으로 4대 외화 소득원이 위축돼 80%의 외화 소득 감소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집트 정부는 최근 변동 환율제 도입 이후 파운드 가치 급락으로 물가인상 요인이 발생하자 수입관세 환율을 한 달 간 인위적으로 달러 당 5.53 파운드에 고정하는 고육책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필수 식료품을 제외한 일부 상품의 수입을 3개월 간 한시적으로 동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집트 정부는 또 전쟁 발발시 이라크와 인근 아랍 국가들에 거류 중인 자국민들이 한꺼번에 귀국길에 오를 것에 대비해 비상 소개대책도 마련했다. 이라크에는 현재 6만5천 명의 이집트인이 취업 또는 거류 중이며 시리아와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요르단 등에 135만 명의 이집트인이 거류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사우디에만 93만 명이 취업 중이며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꺼번에 5만 명이 귀국을 결정할 것으로 이집트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 사우디 아라비아=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지지해 국내이슬람권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던 사우디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국 주도의 이라크 군사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18일 선언했다. 사우디의 실질권 통치자인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왕세자는 TV로 중계된 대국민연설에서 "(사우디)왕국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라크 형제를 겨냥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군대는 이라크 영토 안에 한 뼘도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우디는 이라크 전쟁이 수니 이슬람 국가인 자국의 정치,사회적 안정에 상당한부작용을 야기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라크가 분열돼 시아파와 수니파, 쿠르드족이 각기 독립할 경우, 시아 이슬람 국가인 이란과 세력균형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그러나 전쟁의 북소리를 멈추기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 군과 치안조직의 대비태세를 강화하고, 대 이라크 국경수비에도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이다. 사우디 당국은 특히 전쟁 발발시 10만 명의 이라크 난민이 유입할 것으로 예상, 이라크 인접 공항에 대한 민간 항공기 접근을 금지했다. 난민 대량 유입사태가 발생할 경우 `외국 전문가들'이 효과적으로 상황을 다루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당국은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국영 석유회사 사우디 아람코의 거점인 동부 지방의 원유시설 주변에치안조치를 강화했다. 또 이달 초 열린 재무, 보건, 농업, 수자원, 전력, 운수부 등 주요 부처 장관 합동회의에서는 처음으로 민간 기업들이 방독면을 수입해 국내에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키로 했다. 일반 국민에게 수개월 치 비상 의약품을 배급했으며 식량도 3개월 간 차질없이 공급할 수 있는 분량을 비축했다. 사우디에는 현재 프린스 술탄 공군기지 등에 9천 명의 미군 병력이 주둔해 있다.당국은 최근 서방인들을 상대로 한 총격 사건과 폭발물 적발 사건 등이 빈발함에 따라 외국 시설에 대한 경계를 대폭 강화했다. ◆ 요르단= 요르단은 후세인 이라크 정권이 제공하는 경제지원의 최대 수혜국이다. 연간 500만 톤의 원유를 공급받고 있으며 이중 절반을 무상으로 지원받고 있다. 이라크는 유엔의 석유-식량 프로그램에 따른 요르단의 최대 수출 시장이기도 하다. 더욱이 요르단 인구 중 절반이 팔레스타인계로 이들은 심정적으로 이라크 정권을 가장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압둘라 2세 국왕은 이같은 대내 여건과 미국의 경제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대외여건을 감안, 일찍이 이라크 전쟁에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이라크와 접한 서부사막에 미국과 영국군 특수부대의 배치를 허용하는 등 곡예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이라크도 최근 요르단에 미.영국군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소문과 관련, 이 문제는 요르단이 결정할 사안이라며 문제삼지 않는 예외적 관용을 보였다. 그러나 요르단은 이라크 위기로 가장 큰 경제적 피해를 입게될 역내 국가이다. 요르단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4.3% 적자를 반영한 올해 전시 `비상 예산'을 편성했다. ◆ 레바논, 시리아, 이란= 레바논은 최근 이라크 위기로 예상치 못했던 관광특수를 누렸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서구적 분위기를 풍기는 레바논으로 도피성 관광인파가 몰렸기 때문이다. 레바논 중앙은행은 최근 국제 공여국들의 지원 등에 힘입어 외환 보유고를 100억달러로 늘렸다고 발표했다. 또 전쟁이 벌어질 경우 에너지 가격 급등과 수출 중단등 예상되는 부정적 여파를 상쇄하기에 충분한 준비를 갖췄다고 정부는 밝혔다. 레바논은 정치적 후견국인 시리아의 입장에 동조, 아랍연맹 회원국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반전, 반미 노선을 표방해왔다. 이밖에도 미국이 지목한 `악의 축' 국가들인 이란과 시리아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공개적으로 반대입장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은 이라크 사태 해결후 부시 행정부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한 다분히 자위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시리아는 이라크 정권에 공공연하게 지지와 연대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라크를 탈출하는 인파에 대해서도 가장 우호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시리아에는 현재 50만명이상의 이라크인들이 전쟁위기를 피해 머물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난민수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란도 이라크 전쟁 발발시 이라크 난민이 대거 몰려들 것으로 예상, 난민 수용시설 마련 등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란은 최근 이라크와 1980년 이란-이라크전쟁 포로를 교환하는 등 우호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카이로=연합뉴스) 정광훈특파원 barak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