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침공계획에 미온적 반대 입장을 보여온 이집트에서 27일 사상 최대 규모의 이라크 전쟁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에는 10만-14만명이 참가해 대중 집회 규모면에서도 30여년만에 최대였다. 또 지난 해 여름 이라크 위기가 불거지기 시작한 후 정부가 허가한 최초의 대중시위였다. 이집트에서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암살 후 1981년부터 22년째 시행되고 있는 비상계엄령에 따라 대학 교정 등 극히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곤 대중 시위가 금지돼있다. 지난 15일 전세계적인 반전 시위가 벌어졌을때도 카이로에선 1천명 안팎이 참가한 소규모 관제 시위가 벌어져 주최측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이날 카이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시위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직후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대통령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철회를 요구하며 벌인 대중시위 이후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시위는 이슬람계와 좌파 및 범아랍 나세르주의 정당등 야당 연합세력과 의사회 등 여러 단체들의 주최로 열렸다. 주최측은 폭력 가두시위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는 정부측을 안심시키기 위해 경기장을 장소로 택했으며 내무부는 이례적으로 시위를 사전 승인했다. 카이로를 비롯해 수에즈와 이스마일리야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시위 참가자들은 이집트와 이라크, 팔레스타인기(旗)를 흔들며 경기장 트랙을 돌았다. 경기장 안팎을 가득 메운 시위대는 "우리의 피와 정신으로 이라크를 위해 희생할 것"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또 아랍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 3개국어로 "석유 위한 전쟁 반대" "미국=테러리즘"이라고 쓴 반전 플래카드 2만여개를 흔들었다. 시위에는 특히 이슬람 수니파와 콥트 정교도 지도자들이 전쟁 반대의 상징으로 코란과 십자가를 들고 동참했다. 또 히잡(이슬람 신도들의 베일)을 쓴 수 천 명의 여성 이슬람 신도들이 스타디움 한편에 앉아 시위를 지켜봤다. 일부 시위대는 아랍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좌파 야당인 타감무당 지도자 칼리드 모히엣딘은 연설에서 "우리는 시위를 통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미국과 아랍 지도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고 역설했다. 이날 시위는 이라크 전쟁 방지 대책을 논의할 아랍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열렸다. 경기장 주변에는 대규모 경찰 병력이 배치돼 폭력 사태에 대비했다. 집권 국민민주당도 다음주 중 50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전시위를 주도할 계획이라고 관영 일간지 알-아흐람이 보도했다. 이집트 정부는 지난주 야당과 지식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을 3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정부가 이날 시위를 허용한 것도 이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는 최근들어 무바라크 정부의 기회주의적 이라크 정책과 아랍권의 사분오열을 개탄하는 지식인들의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카이로=연합뉴스) 정광훈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