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위기의 불똥이 마침내 나토(북서양조약기구), 유럽연합(EU)으로 튀어 미국과 유럽 국가들간, 유럽 국가들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 나토 회원국들인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3국은 10일 이라크 전쟁에 대비해 미국과 터키가 요구한 터키 방위 계획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대해 터키는 나토에 자국 안보 위협에 대한 협의를 요구하는 나토 조항 4조를 발동시켰다. 2차 대전 후 동서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서방의 최고 안보기구로 군림해온 나토가 회원국의 안보 지원 요구를 거부한 것은 전례가 드물며 나토 조항 4조가 발동된것도 사실상 처음이다. 이로써 나토는 안보기구로서의 역할에 대한 최대의 신뢰성 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는 구소련 및 공산권 붕괴로 주적 개념이 상실된 이후 정체성 위기에 빠진 데이어 코소보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통해 무기력이 드러난 나토에 다시한번 일격을 안길 전망이다. 조지 로버트슨 나토 사무총장은 10일 프랑스 등의 거부권 행사에 따른 긴급회의 이후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며 "회원국간에 매우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나토는 신뢰성 위기에 직면했다"며 "이는 세 동맹국이 내린 결정 중 가장 불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이라크 위기는 대외 정책을 둘러싼 EU 내부의 해묵은 불화와 분열을 노출시키고 유럽과 미국의 갈등을 악화시키고 있다. EU는 국제사회에서 정치.외교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공동 외교를 표방하고 있으나 이라크 위기가 터진 이후 이에 대한 공동 외교에 합의하기는 커녕 회원국 간입장차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라크 위기에 대한 EU 내 분열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영국, 유엔 차원의 이라크 위기 해결를 주장하는 프랑스, 무조건적인 이라크 공격 반대 입장을 표방하는 독일 등으로 대변된다. 상당수의 EU 국가들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 지지 쪽으로 돌아선 가운데 프랑스와 독일이 나토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무대로 이라크 전쟁 저지에 나서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이라크 위기와 관련해 EU 내부 분열이 확산되자 EU의장국인 그리스는 17일자로 긴급 EU 정상회담을 소집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나토에서 터키 방어를 위한 미국의 계획을 비토한 데 이어 오는 14일에는 안보리에 이라크 위기 해결을 위한 '평화대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고위관리들에 따르면 이 대안은 佛-獨 독자의 이라크무장해제안이 아니며 프랑스가 이미 제안한 이라크무기사찰 강화안의 세부계획이 될 것으로 보이나 이는 이라크 공격 준비의 고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미국에 큰 타격을 안겨줄 전망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계획이 알려지자 EU내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진영은 환영의 사를 표시했으나 일부에서는 EU 공동외교에 또다시 혼선을 주는 행위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 무엇보다 이라크 위기로 인해 가장 위협받고 있는 것은 전통 맹방을 자랑해온 미국과 유럽의 동맹관계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佛-獨 평화대안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으며 프랑스와 독일은 최근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9개국이 아무 언질없이 이라크 위기와 관련해 미국 지지를 선언하자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방장관이 프랑스와 독일을 "늙은 유럽"이라고 폄하한 데 대해 유럽에서는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통을 가진 유럽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힐난이 쏟아지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현경숙특파원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