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전세계를 놀라게 한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공중 폭발사고가 발생하자 사람들은 또다시 백악관을 응시했다. 16개월전 사상 초유의 `9.11테러' 사태의 잔상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내린 경악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시 대통령은 마치 서부시대의 보안관처럼 세계 앞에 섰다. 그리고는 "미국은 테러범을 끝까지 추적, 반드시 응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과 이어 이라크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로 이어진 부시의 단호한 전쟁선언은 아직도 세계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컬럼비아호 폭발사건은 일단 테러 가능성이 일축되면서 부시의 `서부 사나이'선언은 없었지만 국민적 애도를 주도하는 부시의 상주(喪主)역할은 어김없이 재현됐다. 그는 9.11테러 당시 테러의 잔해에서 `복수'을 다짐하던 모습 대신 백악관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한 유가족과 국민을 위로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컬럼비아호는 상실됐다. 생존자는 없다"면서 릭 허즈번드 선장을 비롯한 희생자 7명의 이름을 차례로 나열한 뒤 명복을 빌었다. 그러면서 "오늘 하늘에서 우리는 파괴와 비극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멀리에 위안과 희망이 있음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나아가 희생자 가족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니가...이 나라의 존경과 감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텍사스 어투가 여전한, 그러면서 결연하면서도 다소 거친 모습의 부시는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쳤다. 미국의 대통령이 국민들의 아픔을 달래는 역할에 나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내전 당시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성명을 줄기차게 쏟아내며 대통령의 위안자 노룻에 충실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사고 당시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명복을 비는 성명을 발표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1995년 오클라호마 사태 당시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상주로서의 대통령'에 있어 부시 만큼 확실한 대통령은 없었다는 것이 미 언론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뉴스전문채널 CNN은 `부시의 날:비극을 다루면서'라는 제목으로 부시의 이날 하루 동정을 자세히 전하기도 했다. ▲오전 8시(이하 미 동부시간)=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 인근의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정보 브리핑 받음. ▲오전 9시= 앤디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 비상상황 포착, 미 항공우주국의 션 오키페 국장 찾았으나 접촉이 안됐다. 이후 부시 대통령은 컬럼비아 상황에 대한 첫 보고를 받고 후속 상황 추적토록 카드 실장에 지시. ▲오전 9시15분= 카드실장과 오키페 국장이 접촉에 성공했고 오키페 국장은 상황을 설명했다. 카드는 역시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있던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담당보좌관에 즉각 통보했다. 이곳에는 라이스 보좌관뿐 아니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물론 리처드 마이어 미 합참의장도 모여있었음. ▲오전 10시30분= 부시는 오키페 국장으로부터 전화로 상황보고를 받은 뒤 즉각 일정을 앞당겨 백악관 귀환을 결정. ▲오후 12시15분∼30분= 부시는 백악관으로 귀환했다. 그리고는 곧장 집무실로 올라가 다시 오키페 국장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들은 뒤 "모두에게 어려운 날"이라고 말함. ▲오후 12시40분= 부시는 집무실에서 케네디 우주센터의 컨퍼런스 홀에 모여있는 희생자 가족들에 전화를 걸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에 위로의 뜻을 전함. 그리고 5분후에는 백악관 루스벨트 룸에서 라이스 보좌관과 톰 릿지 국토안보부장관, 과학보좌관 등으로부터 상황을 다시 보고받음. ▲오후 1시25분=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 아리엘 샤론 총리에 전화를 걸어 위로. 아울러 부시 대통령은 멕시코 빈센테 폭스, 프랑스 자크 시라크,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캐나다 장 크레티앙 캐나다총리로부터 위로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 대국민 연설을 준비했다. ▲오후 2시=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국무회의실에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