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3시께(현지시간) 영국인 레지널드 크루(74)는 스위스 취리히의 작은 아파트에서 스위스 의사가 준비해준 수면제인 바르비투르를 과다 복용한 뒤 아내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지난 4년간 진행성 마비를 일으키는 신경질환인 `운동뉴론질환'으로 고생해왔던 크루는 이로써 취리히 소재 비영리단체인 `디그니타스(Dignitas)'의 지원을 받아 자살한 외국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크루는 그동안 계속 자살을 희망해왔지만 영국에서는 자살을 도와주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스위스행을 택했던 것. 불치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체인 디그니타스의 설립자 로드빅 미넬리 사무총장은 AP통신에 "크루는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고통없이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디그니타스는 특히 자살 지원 단체중에서도 외국인들을 지원해주는 유일한 단체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다 안락사를 원하는 외국인 환자들의 스위스행이 점차 늘고있다. 크루씨의 사망으로 디그니타스의 지원을 받아 자살한 환자는 모두 146명에 달했다. 지난 2000년에는 50명의 환자가 디그니타스의 지원하에 자살했고 지난해에는 75명으로 늘었다. 디그니타스의 설립자인 루드빅 미넬리 사무총장은 올해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날것으로 전망했다. 디그니타스는 연간 회비 18달러를 내는 외국인 회원만 2천350명에 달한다. 영국에서 자살은 합법이나 타인의 자살을 지원하는 행위는 최고 징역 14년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다. 미국에서는 오리건주(州)가 유일하게 의사의 협조를 받아 자살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이 역시 끊임없는 논쟁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유일하지만 이들 국가에서도 환자가 합법적 거주자여야 하고 환자와 의사간 오랜 유대관계가 성립할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안락사가 허용된다. 그러나 스위스는 타인의 자살을 도와주는 행위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 특정한 사익(私益)이 개입됐을 경우에만 형사 처벌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으며 다만 이를 통해 영리를 취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상담원이나 의사는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를 위해 수면제를 준비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환자에게 건네주거나 복용을 직접 도와줄 수는 없다. 디그니타스는 단지 불치병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의사를 반복적으로 표명해온 환자들이 자살하는 것을 도와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크루는 지난달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4마일을 달리는 것과 같고 그것에 넌덜머리가 난다. 나는 단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한다"면서 디그니타스를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기회"라고 말했었다. 미넬리 사무총장은 "절망에 빠져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라면서 "나는 이를 자랑스럽다고 말하진 않지만 나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제네바 AP=연합뉴스) hoon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