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와 '미국'이란 두 단어가 동시에 들어간 기사를 넥시스란 검색엔진을 통해 찾아보았다. 미국 주요 언론 중 2000년 12월에 쓰여진 기사는 6건에 불과했다. 2001년 12월에는 2백92개로 늘었고 2002년 12월에는 무려 5백66개였다. 2003년 12월에는 어떨까. 5년전 이코노미스트들은 1930년대의 괴물이 또 다시 지구상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계 2대 경제대국인 일본이 가격하락과 실업률 증대의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업비리'처럼 '디플레'도 당시에는 미국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형 기업비리 사건이 줄이어 터진 것처럼 디플레의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관리들은 우리가 일본형태의 '블랙홀'을 피해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블랙홀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 있다. 이미 경제의 일부 영역들은 영향을 받고 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경제가 침체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FRB는 금리인하로 대응하고 있지만 '제로금리'조차도 경제를 완전고용 상태로 회복시키지 못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미 경제는 '이벤트 호라이즌'(블랙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이 곳을 넘으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선)을 지나고 있다. 과도한 설비로 인해 가격은 떨어지고 기업과 개인들은 차입을 꺼려 한다. 떨어지는 물가가 실질적인 상환부담을 증대시켜 주는 탓이다. 소비침체가 이어지면서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이 과정에서 물가는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일본의 경험에서 보면 블랙홀로 들어가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이 일본 경기침체의 시작을 1991년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일본경제는 비록 조금씩이긴 하지만 98년까지 실질적인 성장을 했고 일본 관료들도 그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 경제는 지난해 조금 회복된 데 만족해서는 안된다. 지난해 성장은 거의 고용을 늘리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생산능력과 생산량의 차이인 '아웃풋 갭'은 점점 벌어졌고 디플레 위협은 1년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이미 디플레에 들어간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가격은 오르고 있지만 기업들이 받는 것은 그렇지 않다. 물가지수는 2001년 3분기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미국 경제는 지금 '이벤트 호라이즌'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다. 디플레 압력에서 벗어나려면 새해 GDP(국내총생산) 성장이 최소 4.5%는 돼야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전망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블랙홀이 끌어 당기는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90년대 초만 해도 3%의 금리는 경제를 부추기기에 충분했지만 지금은 1.25%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1년 뒤에 금리가 0%로 내려간다 해도 경기가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다. FRB는 '저금리'외에도 많은 정책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 경제가 블랙홀에 빠질 것이란 주장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저금리 이외의 정책들은 아직 실험된 적이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FRB는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리=육동인 뉴욕특파원 dongin@hankyung.com -------------------------------------------------------------- ◇이 글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가 뉴욕타임스(2002년 12월31일자)에 기고한 '가격의 위기?(Crisis In Prices?)'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