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 남부 극장에서 발생한 인질 사건은 체첸전을 토대로 권좌에 오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큰 타격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 집권 3년여 만의 최대 사건인 이번 인질극은 체첸과의 협상과 전쟁종식 요구를 거부해온 그동안 크렘린궁(宮) 정책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첫 날을 뜬 눈으로 지샌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결코 도발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존의 강경 방침을 재천명하고 나섰으나 주변 상황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실정이다. 푸틴 대통령은 우선 자국민이 인질에 포함돼 있는 외국 정부들로부터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노골적 압력을 받을것으로 보인다. 괴한들은 외국인 인질들의 소속 국가 대표들과 면담을 요구하고 있고, 자국민이인질로 잡혀 있는 미국을 포한한 17개국 대사들도 사건 직후 현장으로 달려가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또 체첸측과 대화 및 조속한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인질 자신들의 요구도 큰 부담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여자 인질인 마리나 쉬콜니코바는 언론과 휴대전화 통화에서 "우리는 이미 전쟁에 신물이 났으며 평화를 원한다. 정부의 합리적 결정을 기대한다"며 빠른 전쟁 종결을 촉구했다. 사전 준비가 매우 치밀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건은 또 푸틴 대통령의 대외이미지에도 적지 않은 흠집을 낸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9.11 테러' 이후 서방측과 공조 체제 강화로 국제적 명성이 더욱 높아진 푸틴 대통령은 이미 독일과 포르투갈 방문 계획에 이어 이번 주말 멕시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참석 계획도 전격 취소하는 등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상황이다. 이번 사건은 또 승조원 118명의 생명을 앗아간 2000년 8월 핵잠수함 쿠르스크호(號) 침몰 사고의 악몽을 되살리고 있어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이래저래 죽을 맛이 아닐 수 없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쿠르스크호 사고 소식을 보고 받고도 흑해(黑海) 연안 소치에서 휴가를 계속 즐기고, 외국의 지원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아 국민적 비판 여론에 직면했었다. 여기에 최근에는 체첸전에 대한 국민 여론 조차 부정적으로 돌아서는 양상을 보여 내년 총선과 2004년 대선을 앞둔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모스크바 카네기 연구소의 릴리아 쉐브초바 박사는 "이번 인질극은 국가 및 푸틴 대통령에 대한 '모욕'이며, 체첸 정책에 대한 도전"이라며 "푸틴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이봉준 특파원 joon@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