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차 유엔인권위원회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대립이 첨예하게 표출된 가운데 6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26일 폐막됐다. 미국이 지난해 위원국 선거에서 탈락, 사상 최초로 옵서버 지위로 전락한 상황에서 열린 이번 유엔인권위는 9.11 테러사태이후 핵심적인 현안으로 부상한 대테러전 수행을 위한 반(反)테러법안 및 제반 조치들과 이로 인한 기본적 인권침해 문제를 놓고 열띤 공방이 전개됐다. 그러나 회의 초반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내 군사작전 감행과 자살공격 등 유혈충돌, 그리고 양측 민간인에 대한 폭력행위 및 인권침해 문제가 최대쟁점으로 부각되는 바람에 다른 주요 의제들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인권위는 중동사태에 관한 공방으로 예정에 없던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메리 로빈슨 인권고등판무관을 단장으로 하는 현지조사단 파견을 결의했으나 결국 이스라엘 당국의 비협조로 인해 조사단 파견이 무산됐다. 인권위는 폐막일인 26일까지도 이스라엘의 조사단 수용거부를 비판하는 결의안 채택을 놓고 막판까지 논란을 거듭했다. 전통적으로 인권침해국으로 지목돼온 중국과 러시아는 자국내 소수민족 문제 등을 고려해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적극 두둔하고 나섰으며 미국도 중국내 인권상황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낮췄다. 반면 유럽연합(EU)은 테러전 수행을 명분으로 기본적 인권보호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중국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한 15개 회원국내 이견으로 미국을 대신해 대(對)중국 인권규탄 결의안을 제안하지 못했다. 미국은 지난 10여년에 걸쳐 대중국 인권규탄 결의안을 제안했으며 이에 맞서 중국은 불처리동의안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본안 상정을 저지해왔다. 중국은 53개국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비동맹진영이 대거 포함된 점을 이용해 쿠바와 나이지리아 등을 앞세워 불법 대선시비와 언론자유 침해 등으로 EU 등의 제재를 받고 있는 짐바브웨에 대한 결의안 채택 반대를 주도했다. 지난해와 달리 러시아의 체첸에 대한 인권침해 규탄 결의안은 부결됐으나 수단과 미얀마 등 약소국에 대한 결의안은 통과되는 등 강대국은 물론 개도국 진영내에서도 정치적 이해에 바탕을 둔 이합집산이 노골적으로 전개됐다. 특히 국제인권단체들은 멕시코가 각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반(反)테러법안과 조치들에 대한 감시 및 분석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가 이를 철회한 것을 놓고 미국을 배후로 지목하고 강력한 유감을 표시했다. 국제앰네스티(AI), 휴먼라이츠워치, 국제법률가위원회, FIDH 등 주요 국제인권단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멕시코가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결의안 내용을 희석하기 위해 수정안을 제안한 알제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파키스탄 등의 방해, 그리고 유럽연합(EU)의 무기력에 직면, 마지못해 제안했던 결의안을 철회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과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 반테러조치들이 탄압의 명분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인권위에 촉구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처럼 중요한 사안에 관해 인권위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테러전 수행에서는 모든 것이 통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인권위를 끝으로 퇴임하는 로빈슨 인권고등판무관은 고별사를 겸한 폐회사에서 인권문제를 갈수록 정치화되고 있다는 비판과 우려를 전해듣고 있다면서 "이제는 우리 모두 심각한 인권침해를 조명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을 통해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인권위의 기본적인 역할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라고 일침을 가했다. 로빈슨 고등판무관은 이어 지난 60년대 중반 유엔총회, 경제사회이사회, 그리고 인권위가 인권문제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던 신생 독립국들이 이제 와서는 개도국에 대한 비판이 너무 심하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인권위의 인권보호 기능을 약화시키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점에 각별한 우려를 표시했다. 이번 인권위는 과도한 통역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저녁 및 심야 회의를 없애고 발언시간도 30%를 축소하는 편법운영으로 인권단체들이 반발하고 유엔특별 보고관들이 구두보고를 집단으로 거부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등 일부 국가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금장소에 대한 국제방문단의 무제한적 수용을 골자로 하는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 초안이 표대결에서 통과된 것등은 긍정적인 성과를 받아 들여지고 있다. 한편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대북 개방과 개혁노선을 지지하면서 북한과의 수교 및 인권개선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EU는 일련의 조건을 제시하고 내년 인권위에서 대북 인권규탄 결의안 추진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강경방침을 시사하는 등 9.11 테러이후 `변화된 상황'을 반영했다. (제네바=연합뉴스) 오재석 특파원 oj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