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아르헨티나 금융위기가 장기화하면서 한인사회의 붕괴도 가속화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한인교민은 브라질 다음으로 많아 한때 2만5천∼3만명을 헤아렸으나 약 4년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가 작년말 아르헨 정부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과 은행예금 동결조치로 절정에 이르면서 올들어 지난 3월말 현재 6천∼7천명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경제개혁안을 놓고 아르헨 정부와 IMF간팽팽한 대결로 추가차관 합의가 늦춰지고 있는데다 "예금인출 제한은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법원의 판결로 인출사태가 속출, 인출제한이 전면동결 조치로 바뀌면서 교민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실정이다. 경제와 금융위기가 갈수록 정도를 더하자 교민들은 살던 집과 가게를 헐값에 내놓고 재이민 또는 한국으로의 역이민 방안을 찾고 있으나 현금부족에 따른 부동산경기의 곤두박질로 집이나 가게를 아예 방치한 채 빈 손으로 떠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재이민을 떠나는 가정이 최근들어 이처럼 크게 늘자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타운의 교민 음식점마다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송별회가 열리고 있으며, 한인타운이나교민 의류상점들이 밀집한 시내 아베자네다와 온세 등의 상가표정도 점차 썰렁해지고 있다는 게 교민들의 얘기다. 아르헨티나를 떠나는 교민들이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 곳은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떠나는 교민들은 다른 곳으로 재이주하는 교민보다 재정형편이 그나마나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제위기 이전에 사업기반을 닦았던 이들은 미국 영주권을 확보한 뒤 경제위기를 관망하며 그럭저럭 사업을 이끌어왔으나 위기의 끝이 보이지않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미국행을 택하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는 아르헨티나보다 경기가 좋은 것으로 알려진 멕시코와 브라질이 재이주 대상국이다. 멕시코의 한인교민 숫자는 2년전만 하더라도 5천명 남짓한 수준이었으나 그 이후부터 아르헨티나와 페루, 에콰도르 등으로부터 교민유입이 늘면서 지금은 1만3천∼1만5천명 수준이라는 게 한국대사관과 한인단체의 추정이다. 2개월전 멕시코로 재이주한 전 아르헨교민 김모씨(51.식당업)는 "아르헨 교민들의 재이주는 한 마디로 `탈출'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면서 "예금동결와 페소화 평가절하로 가만히 앉아있어도 원금을 손해보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그곳에서 살려보 버티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또 "공장이나 대형상점 등 사업기반을 다진 사람들은 손해를 감수하며 기회를 보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교민들은 하루빨리 아르헨티나를 떠나고 자재이주 정보교환에 부산한 모습"이라며 "내 경우도 턱없이 떨어진 가격에도 가게가팔리지 않는데다 매월 5천∼6천달러씩의 손해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그대로 내버려두고 탈출하다시피 멕시코로 왔다"고 말했다. 멕시코로 갓 재이주한 최모씨(48.의류업)도 "요즘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타운의 음식점마다 연일 송별회가 벌어지고 있다"며 "형편이 좋은 상태에서 헤어지면 몰라도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기약도 할 수 없는 모임이라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가 착잡하고 숙연한 표정들"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또 "아르헨티나 경제가 짧은 시간안에 회복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당장어렵더라도 생활의 터전을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향후 10년안에는 경제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믿음처럼 확산되면서 한국 교민뿐 아니라 유대인과 현지인들도 짐을 꾸리기에 바쁘다"고 강조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성기준특파원 bigp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