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가 3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엔 가입안을 통과시킨 것은 탈냉전 이후 가속화하는 세계화의 흐름에서 더는 '유아독존'할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철저히 외부 세계와는 고립한다는 정책을 선택해 왔는데도 남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독립적인 위치와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제사회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져왔다. 이와 더불어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미국의 공화당 정권 출범과 9.11 테러 사건 이후 제기되는 미국의 `일방주의' 논란과 관련해서도 시사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스위스의 이번 선택은 미국의 독주로 전 세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다자기구인 유엔의 위상이 약화하는 데도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여러 문제를 `다자의틀'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국제화 시대를 맞아 영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제기되는 등 경제적 실익을 위해서도 국제사회와 더욱 긴밀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대돼 왔다는 점도 이번 국민투표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된다. 스위스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와 휴면계좌 문제 등이 뒤늦게 폭로돼 국제적 압력에 의해 12억5천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스위스가 이때문에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해서도 더 외부와 단절을 고집할 수 없게 됐고 유엔과같은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표출했다고 분석했다. 스위스의 대외개방 조짐은 최근 수년 동안 점진적으로 전개됐다. 스위스는 지난2000년 5월 유럽연합(EU)과 7개분야에 걸친 자유무역협정을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했다. 이 협정은 EU 회원국들의 국내 비준 절차를 모두 마치고 빠르면 올 상반기중 정식 발효한다. 아울러 유엔의 입장에서 보면 교황청을 제외하고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스위스를마지막으로 유엔의 회원으로 가입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전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확보하게 됐다. 유엔은 특히 스위스가 제네바 소재 유엔 유럽본부의 주최국이고 경제적으로 `대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유엔 분담금 증가 등 유형무형의 측면 지원도 기대할 수있게 됐다. 스위스의 이번 국민투표는 예상대로 전체 국민투표에서는 과반수 득표를 확보했지만 칸톤(州)별 집계에서는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한 접전이 전개됐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칸톤별 집계에서 1표(찬성 12대, 반대 11)라는 근소한 차이로 유엔 가입안이 통과된 것은 도시 지역의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표를 행사한데다, 전체 인구의 약 70%를 점하면서도 대외개방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온 독어권주민의 일부가 지지표를 던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스위스가 유엔에 가입한다 해도 일부의 우려처럼 중립국을 포기하지는않는다는 게 대다수 정치 분석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스위스 정부도 유엔 가입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상존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고수해온 중립국 노선을 철저하게 견지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국제적 분쟁중재, 인권문제, 난민지원 등의 분야에선 지금보다 더욱 능동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는 제네바 한반도 4자회담을 비롯해 콜롬비아 반군협상 등 여러 국제분쟁 협상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해온 바 있다. 이밖에 국내 정치적으로는 최근 수년간 유럽 전역에서 세를 확장해온 보수.우익정파의 기세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원내 제2정당 스위스국민당을 이끄는 대중정치인 크리스토프 블로허 당수는 유엔 가입 반대운동에 자신의 정치적 장래를 걸었으나 결국 가입안이 통과됨으로써 당분간 스위스의 우파 경향도 주춤해질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번 스위스의 유엔가입안 가결은 정부 뿐 아니라 4개 연립정당중 스위스국민당을 제외한 3개 정당과 재계, 언론까지 나서 유엔 가입 찬성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이번 국민투표 과정에서 영세중립국 지위 포기 문제가 논란이 됐지만 스위스가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의 회원국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많지 않다. 지난 1920년 5월 실시된 국제연맹 가입 국민투표는 공교롭게도 이번 유엔 가입투표와 똑같은 형태로 승인됐다. 당시 국민투표는 유권자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고칸톤별 투표에서도 11.5대 10.5의 1표라는 아슬아슬한 차로 가결됐다. (제네바=연합뉴스) 오재석 특파원 oj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