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동결과 평가절하 시대의 아르헨티나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항의시위와 은행에서 장시간 대기하는 것 말고도 소비습관부터 생활계획까지 모두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은행예금도 마음대로 꺼내쓸 수도 없고 잔돈 마저도 쪼개써야 하는 시대인 만큼 치열한 ''생존경쟁''이 불가피하게 됐다.

다음이 현지언론이 전하는 아르헨 국민의 달라진 생활상을 요약한 것이다.

▲알레한드로 카스티요(36.회사원)= 평가절하 이전엔 슈퍼마켓에서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기전 가격표를 두번 정도 쳐다봤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소비자들은 최소한의 생필품만을 고르거나 할인판매하는 상품을 우선적으로 고른다. 나 역시 당장 필요치 않은 물건에 돈을 쓸 여력이 없다.

생일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카레푸(프랑스계 슈퍼마켓)에 갔지만 구입한 물건은 고작 음료수와 빵, 밀가루, 약간의 과일과 채소류 등이 고작이었다. 이전같으면 카트 바퀴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각종 상품을 집어넣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초긴축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수산나 디에게스(35.전문직 여성)= 작년 11월까지 미국인 회사에서 일하다 감원바람이 불면서 정리해고 됐다. 해고수당과 퇴직금이 거래은행의 달러계좌로 입금됐으나 현재로서는 통장이 무용지물이다.

최근 새 정부가 예금인출 제한조치를 확대하면서 3천달러 이상이 예금된 통장은 내년까지 사용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장 전기료와 수돗물값, 전화요금 등 각종 공과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내게는 쓸 수 있는 돈이 없다. 또 지난해 팔레르모공원 근처의 오피스텔을 매입하면서 4만달러의 융자를 받았으나 융자금 상환 역시언감생신이다.

연금생활자인 부모에게 매달 500달러의 용돈을 드렸으나 지금은 한 푼도 드릴 수 없는 상태다. 현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점점 바보가 돼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막막하기만 하다.

▲바니나 오네토(28.필드하키 국가대표팀 선수)= 4개월전부터 국가대표팀 선수들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이 중단됐다. 더구나 은행예금 인출마저도 어렵게 돼 선수단과 정부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큰 고민이다. 선수단도 이런 형편인데 국민의 고통이야 오죽 심하겠는가.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냄비를 두드리고 타이어를 태우며 항의시위를 벌인 것을 십분 이해하겠다.

▲알베르토 구트만(52.농업기술자)= 외국 농산물을 취급하는 조그만 수입상을 경영하고 있으나 파산 직전이다. 예금동결 확대조치로 대금 지불이 매우 어려워져 모든 거래선이 떨어져 나갔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도 없고, 내게 팔려는 사람도 없어졌다. 결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내가 제시하는 모든 당좌수표는 거부당하기 일쑤이다.

내 사무실에는 14명의 전문인력이 있는데 평가절하 조치로 월급이 실제로 40%이상 깎인 셈이기 때문에 근로의욕을 잃었다. 달러화 빚이 10만달러 이하일 경우엔 페소화로 전환한다는 정부의 경제대책에 따라 은행 융자금중 9만2천달러가 페소화로바뀌었으나 현금동원력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물어야 할 이자까지 감안한다면 적지않은 고통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안토니와 카리소(TV방송 사회자)= 은행예금을 가진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사정이 비슷하기에 새 경제대책에 맞춰 지출습관 등을 바꿔야할 처지에 놓였다.

이전에는 모든 결제를 현금으로 했으나 지금은 가급적이면 가계수표나 신용카드로 하고 있다. 예컨대 맥주 한 병에 샌드위치를 먹고도 신용카드를 내미는데 이는현금도 부족하고 구하기도 어려운 현금을 굳이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제는 음식점이나 가게에서 수표와 신용카드를 받으려고 하지않아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나 역시 은행 두 곳과 거래중인데 예금을 찾기 위해 은행 앞에서 긴 줄을 서야 할 때마다 큰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다른 고객들도 물론 마찬가지 입장이겠지만 나처럼 방송을 통해 알려진 사람 역시 은행 앞의 장사진에 합류해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해 자괴감이 들 뿐이다.

▲아마데오 카리소(75.전 축구선수)= 저축액이 없기 때문에 당장 내가 겪는 고통은 없다. 내 처와 나는 먹는 것도 별로 없는데다 자녀들이 일부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돈 쓸 일은 거의 없어 다행이다.

그러나 예금주가 자신의 돈도 마음대로 꺼내쓸 수 없을 정도로 국가경제가 형편 무인지경이 된 것이 통탄스럽다. 이 모든 현실이 혹시 환상은 아닌가.

아무튼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며, 그 만큼 내 영혼은 피곤하기만 하다.

▲셀리아 델리(60.불문학 교수)= 어제 집안일을 하다 유리창을 깨지면서 왼손의 힘줄이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비록 사고였지만 최근의 국내 사정과 맞물려서 정말 짜증스러웠다.

남편과 나는 캐나다 유학후 현지 취업한 두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4개월전에 이민비자를 신청해놓았다. 조종사인 내 남동생도 5년전부터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 살고 있다.

이민가기 위해 살던 집도 내놓아 이달초 매매계약을 체결했으나 대금 결제방식을 놓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현금이 없는 매입자가 수표 결제를 원하고 있으나 ''불확실성의 시대''에 수표 결제가 말이나 되는가. 결국은 매입자의 예금통장 명의를내 명의로 바꾸는 것으로 해서 정리됐으나 매우 씁쓸할 따름이다.

이달말 집을 비워주고 나면 우리 부부는 당분간 갈 곳도 없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라울 발비(28.권투선수)= 평가절하와 예금동결이 링의 세계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에 오르면서 20만달러 이상을 벌었지만 예금인출이 갑작스럽게 동결됐으니 말이다.

프랑스에서 세계타이틀을 따내면서 4만5천달러를 벌었고 미국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나머지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은행에 잠겨있고 내 수중엔 동전 몇 잎만 남아있다.

스폰서들이 대주는 돈으로 근근이 먹고 살고 있지만 지금의 아르헨티나 현실은 사각의 링보다 더 험악하고 힘든 세상이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성기준특파원 bigp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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