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경제가 닫히고 있다. 홍콩의 영광이 중국의 '창문'이었던 특별한 지위에 기인했다면 중국이 열리고 있는 지금 홍콩경제가 닫히고 있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대만경제가 침몰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중국 쇼크의 또다른 단면이다. 더구나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의 정식 회원국 지위까지 얻어낸 터여서 시간이 갈수록 홍콩의 입지는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은 낙관·비관론이 혼재하고 있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비관론이 우세하다. 홍콩은 반세기 이상 의존해 온 '중개무역 패러다임'으로부터 어떻게 변신, 생존할 것인가. 위기의 아시아 경제, 오늘은 한때 중국의 창문이었던 홍콩을 간다. 동남아 최대의 해양 공원인 홍콩섬 남단의 오션 파크. 이곳에 있는 HSBC은행 지점은 요즘 '대륙인 특수'로 무척이나 바빠졌다. 해외 주식투자가 금지돼 있는 중국인들이 관광 명목으로 이곳을 방문, 거액의 현금을 내놓고 홍콩 주식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증권의 김응식 홍콩법인장은 "홍콩의 상당수 증권회사 점포가 중국인들이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맡겨오는 예탁금으로 때아닌 호황을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곳 증시 주변에서는 요즘 개인투자 자금의 절반 가까이가 직.간접적으로 대륙과 연계돼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대륙의 개미군단이 받쳐주는 주가' 지난 9월 중순 9,300선으로까지 밀려났던 홍콩 증시의 항셍 주가지수가 요즘 11,000선으로 올라선 걸 두고 이런 얘기까지 나돈다. 거시경제 지표나 개별 상장기업의 실적 등 재료로만 따지면 항셍지수는 상승세를 탈 이유가 없는데 중국 본토의 개인투자자들 덕분에 주가가 버티고 있다는 것. 실제로 홍콩 경제의 주요 지표는 바닥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3분기 성장률이 전년동기 대비 0.3% 뒷걸음질쳤고 1997년 2.4%에 불과했던 실업률은 올들어 10월 현재 5.5%로까지 치솟았다. 10월말까지의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8% 줄었고 3분기 민간 소비지출은 1.3% 증가로 제자리걸음 상태다. 항셍지수는 작년 3월말 최고가(18,000선)에 비해 반토막 수준을 간신히 벗어났을 뿐이다. 이렇듯 부실한 홍콩의 증시를 그나마 지탱해 주고 있는 중국 본토 사람들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병주고 약준다'며 시큰둥해한다. 홍콩 경제가 부진의 나락으로 빠져든 원인의 상당 부분이 본토에 있다는 얘기다. 중국 경제가 고도 성장을 거듭하면서 상당수의 이곳 기업들을 빨아들이는 소위 '근린 궁핍화'의 부작용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것. 단적인 예가 홍콩과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 경제특구 선전에서 일고 있는 쇼핑 붐이다. 선전은 홍콩의 40~50% 수준에 불과한 물가를 무기삼아 주말마다 홍콩의 쇼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선전쪽 홍콩 경계지역에 있는 뤄후(羅湖)역 앞에 최근 3,4년새 빽빽이 들어찬 쇼핑몰 대부분이 홍콩 사람들을 상대로 '떼돈'을 벌고 있다는 것. 한국은행 홍콩법인의 이용회 수석조사역은 "세계인은 홍콩에서 쇼핑하고 홍콩인은 선전에서 쇼핑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KOTRA 홍콩무역관의 김학민 차장은 "한달 전 주말에 선전 출장을 다녀오는데 1km 구간의 접경지역을 통과하는 데만 무려 다섯 시간이 걸렸다"며 "홍콩 경제가 수출 부진에 더해 내수 위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데는 '선전 효과'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서 미국계 대형 할인점업체인 월마트가 최근 중국지역 본점을 홍콩에서 선전으로 이전, 홍콩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지난해 HSBC은행이 중국지역 본부를 상하이로 옮긴 '사건'에 잇단 것이어서 홍콩 사람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깊어졌다. 홍콩 무역발전국의 에드워드 릉 경제분석실장은 "홍콩이 지금까지 고도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금융 무역 등에서 중국과 외국 기업들을 연결해 주는 관문 역할을 해 온 덕분"이라며 "그러나 이제는 성장 모델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모색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낙관론도 없지는 않다. 영국 출신인 마이크 로스 홍콩투자진흥국장이 대표적인 인물. 그는 "홍콩이 오랫동안 자유무역 및 금융도시로서 축적해온 노하우가 앞으로 중국 도시들과의 경쟁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상하이나 선전이 홍콩의 기능을 보완할 수는 있어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미국의 보잉사가 홍콩에 법인을 신설한 것을 비롯 지난 11월말 현재 홍콩에 적을 두고 있는 3천2백37개 외국계 기업중 30% 가량이 최근 2년내에 진출한 사실이 홍콩의 미래에 대한 '국제적 낙관'을 대변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외부 전문가들은 홍콩이 이제껏 누려온 중개무역 센터로서의 이점은 정도가 문제일 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신한은행의 김명철 홍콩법인장은 "지난 99년 중국이 미국과 WTO 가입 협상을 시작하면서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멀지 않은 장래에 상하이는 북미의 뉴욕이 되고 홍콩은 뉴욕에 의존해 연명하는 토론토의 처지가 될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다"고 말했다. 홍콩=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