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사태와 탄저균 파동을 계기로 다자차원의 신속한 공조와 대응이 기대됐던 생물무기협약(BWC) 제5차 평가회의가 아무런 성과없이 종료된 것은 BWC에 대한 미국과 여타 당사국들이 인식의 격차를 해소하지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번 회의에서 현행 BWC체제에서는 이른바 '불량국가'들의 생물무기개발과 테러조직의 생물무기 구입 및 제조 가능성을 신속히 차단하고 대처하는데 일정한한계가 있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자세는 이미 지난 7월 BWC 검증의정서 초안 수용을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제안 내용의 핵심도 BWC 자체를 강화하기 보다는 외부에서 해법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미국이 회의 개막직후 오사마 빈 라덴과 테러조직 알-카에다에 이어 이라크, 북한, 이란, 시리아, 리비아, 수단 등 6개국을 생물무기개발국으로 공개 지목한 주된의도는 BWC체제의 허점을 부각하는 동시에 검증의정서 거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와는 정반대로 서방진영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은 검증의정서를 비롯해 기존의 BWC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다자군축노력에도 부합하고 생물무기 확산방지의 실효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점에 공감했다. 일부 흠결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자협상을 통해 법적 구속력을 갖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외에는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제안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되 7년여에 걸친 협상끝에 성안을 앞두고 있는 검정의정서 내지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보자는 것이 기조연설에서 나타난 대다수 국가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비공개로 진행된 협상에서 미국은 BWC 본협약의 규정을 강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강력한 제동을 걸고 나와 애초부터 이번 평가회의의 판을 깨자는 심사가 있었던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협상자세가 예상보다 강경하다는 분위기를 감지한 서방진영 등은 최소한 검증의정서의 불씨는 살려두는 것을 마지노선을 정해 놓고 비동맹진영과의 중재를 통해 최종선언문 채택을 위한 문안조정에 주력했다. 그러나 회의 마지막날인 7일 미국은 검증의정서 초안작성을 담당하는 특별협상기구의 폐지를 전격적으로 제안함으로써 검증의정서 논의 자체를 백지화해야 한다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이에 서방진영의 일부 대표들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미국의 일방적인 처사를 비판했으며 회의는 일순간 파국으로 치달았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BWC에 가입한 144개 당사국들은 이번 회의 자체가 무산되는 형식으로 끝날 경우 국제적 비난 여론이 거세질 것을 감안해 일단 본회의를 정회한 상태에서 내년 11월11-22일 속개회의를 열어 후속협상을 갖는 구색을 갖췄지만 별다른 돌파구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한편 이번 회의는 9.11 테러이후 다자주의에 임하는 부시행정부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제4차 도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의 뉴라운드 협상 출범을 주도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임으로써 '선택적 다자주의' 또는 '일방적 다자주의'의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임을암시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BWC 협상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고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돌았다는 후문이다. (제네바=연합뉴스) 오재석 특파원 oj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