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휴렛팩커드(HP) 주주들이 난데없이 'BC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들이 외치는 BC는 기원전 BC(Before Christ)가 아니다. '컴팩이전(Before Compaq)의 HP로 되돌아 가자'는 뜻의 BC다. 컴팩컴퓨터와 합병하지 말고 HP 고유의 길을 계속 걸어가자는 것이다. 처음엔 소액주주들이 BC를 합창하더니 지금은 대주주들도 BC를 연호하고 있다. 지난 7일 HP 창업자 집안인 휴렛가(家)와 팩커드가는 HP-컴팩의 합병반대를 선언했다. 고인이 된 공동창업자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의 자손들은 HP가 컴팩과 합치면 회사 장래가 불확실해질 것이라며 합병 철회를 요구했다. 고조되는 반대 여론으로 칼리 피오리나 HP 회장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 합병 불발시에는 중도 퇴진도 각오해야 한다. 피오리나 회장은 지난 9월3일 "HP가 PC 전문업체인 컴팩과 결합하면 초우량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며 양사의 합병 합의 사실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예상 이상으로 차가웠다. 합병 합의 발표후 지금까지 HP 주가는 30%나 떨어졌다. 또 합병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분석과 진단들이 봇물을 이뤘다. 특히 컴팩과의 합병으로 62년간 이어져온 'HP의 길(HP Way)'이 무너졌다는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창조와 개척정신의 HP의 길이 끝났다는 한탄이었다. 1939년 미 서부 팰러앨토시의 한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된 HP의 길에는 합병 발표가 곧 사형집행 통지서였다. 이 길은 신기술과 신제품 개발의 길이지,다른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길이 아니었다. 지금 이 HP의 길 한 복판에 컴팩 합병이라는 큰 바위가 떨어져 있다. 이 바위가 길 위에 그대로 남아 있을지,길가로 치워질지는 미지수다. 현재로서는 남아있을 가능성이 좀더 크지만 길 옆으로 치워질 수도 있다. HP 이사회는 내년초 합병승인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승인때는 HP의 길은 끊어지고 BC행 티켓도 사라진다. 거부땐 피오리나 회장이 물러나야 한다. 거부는 곧 피오리나에 대한 이사회의 불신임이기 때문이다. HP의 길과 피오리나,둘의 운명이 9명의 HP 이사들에게 달려 있다. lee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