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세계무역센터(WTC) 비행기 테러 폭발 참사가 발생한 다음날인 지난 9월 12일 아침.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세계 금융시장의 심장부인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은 참사 당일에 이어 이날도 폐장을 선언했다. 섣불리 개장할 경우 예상되는 폭락사태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물리적으로도 개장이 쉽지않았다. 주변 증권사들의 타격이 컸고 증권거래소주변은 일반인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테러 충격에 대해 궁금해 하던 독자들은 그러나 이날 정상 발행된 월스트리트저널을 보면서 증시는 폐장했지만 미국 경제는 멈추지 않았음을 느꼈다. 신문이 보도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신문이 발행됐다는 사실이 그같은 감정을 심어주었다. 월스트리트저널 본사가 입주해 있는 세계금융센터(WFC) 건물은 테러로 완전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바로 길 건너편. 직선거리로 30m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신문의 본사 위치를 아는 사람은 대부분 신문이 며칠 쉬거나 기껏해야 한두 페이지 정도만 발행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평소 '비상계획'을 완벽하게 수립해 놓았던 이 신문은 뉴저지주의 인쇄공장에 임시로 편집국을 마련, 신문을 정상적으로 발행했다. 많은 독자들은 "만약 월스트리트저널이 정상 발행되지 않았다면 세계경제의 혼란상은 더욱 심했을 것"이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월스트리트저널이 정상 발행된 것은 미국이 어떤 위기도 잘 대응할수 있을 것임을 알려준 희망찬 신호"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제 발행 자체가 세계경제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증권거래소가 없으면 주식거래가 이뤄질수 없는 것처럼 월스트리트저널 없는 세계 경제는 생각하기 힘들어진 셈이다. '월스트리트의 최고 권부' '세계경제의 나침판' '경제교과서' 등의 수식어는 그야말로 수식어일 뿐이다. 테러 참사 이후 월스트리트저널은 긴급하게 움직이는 세계경제 동향을 차분하게 진단하고, '월스트리트를 재건하자'는 제목의 시리즈물을 내보내는 등 위기의 주식시장과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은 전세계에 6백50여명의 기자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월스트리트저널도 시작은 초라했다. 1882년 친구 사이인 다우 에드워드와 존스 챨스가 월스트리트의 증권맨들에게 '애프너눈 레터(Afternoon Letter)'라는 소식지를 만든게 시초. 소식지가 인기를 끌면서 직원수가 50명으로 늘어나자 1889년 7월8일 '월스트리트저널'이라는 제호의 신문을 정식으로 창간했다. 처음엔 4페이지 발행에 1부당 가격이 2센트였다. 그뒤 1902년 클라렌스 배런이 경영을 맡으며 신문의 체제를 갖추었고 20년대들어 현대식 윤전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급신장했다. 그뒤로도 월스트리트와 함께 성장하면서 주 5일(주말판은 별도) 종합 기업 금융등으로 구성된 3개 섹션, 80-90개면에 걸쳐 '정확성' '완전무결' '진실'이란 슬로건에 맞는 최고급품질의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발행부수(회사측 공식통계는 지난 3월말현재 1백94만3천부) 면에서도 미국 유일의 전국 종합지 USA 투데이와 1,2위를 다투고 있다. 1백만부 안팎인 뉴욕타임즈나 트리뷴지 등과는 큰 차이를 보일 정도. 고품질 정보를 위해 네트워크망도 세계적으로 갖춰 놓고 있다. 미국내에 11개, 해외에 36개의 편집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각각 76년과 83년부터 별도의 신문을 찍어내고 있다. 자매지로는 증권전문주간지인 '배런스'를 비롯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스마트머니등 잡지와 통신(다우존스뉴스서비스) 인터넷(WSJ.com) 방송(CNBC) 등 주요 경제매체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미국 증시의 바로미터로 세계 증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우존스공업평균주가시수를 매일 산정해 발표하고 있는 곳도 바로 이 신문이다. 이 신문이 가는 길이 바로 세계경제의 방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