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이 자국내 반미(反美)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위해 영공 및 영토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미국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기로에 섰다. 미국의 요구에 따르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이, 반대의 경우에는 미국의 분노가 따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파키스탄에 ▲영공 및 영토개방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 및 그가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대한 정보 제공 ▲2천510km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 봉쇄 등을 요청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 요구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고, 빈 라덴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하나라도 빠질 수 없는 불가분의 전제 조건임은 분병하다. 페레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앞서 "파키스탄은 테러의 근절을 지지한다"면서 미국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말처럼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무샤라프 대통령이 14일 미국의 요청을 검토할만한 시간을 미국측에 요청하는 한편, 군최고 지도자들과 장장 7시간동안 회의를 가졌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는 점이 이를 반영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미국인들이 가만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는정도만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딜레마는 현지 분위기에서도 직접 감지되고 있다. 비록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군부 반대파들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의 요구에 양보할 경우 `지하드' 즉 성전(聖戰)에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더 뉴스'지(紙)는 14일 사설을 통해 "냉전 시절 파키스탄의 미국과의 동맹은 파키스탄을 도적과 극단주의자들이 비호되는 혼란속에 빠뜨리는데 일조했다"고 상기한뒤, "미국은 1980년대 소련을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 파키스탄내 호전주의자들과 동맹한 나라"라고 비난하고 "미국의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참여하지 않는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이슬람정당인 `자마트 엘 이슬라미'의 무나와르 하산 사무총장은 "거리로 나서 반미 구호를 외칠 것이며 전체 회교권이 이에 동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이슬람 민병대 그룹 지도자인 마울라나 사미울 하크 역시 "정부가 파키스탄을 아프간공격에 사용되도록 한다면 커다란 배신행위"라고 지적했고, 전(前) 정보국장인 하미드 굴은 "아프가니스탄을 겨냥한 미국의 요구는 파키스탄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과의 협력이 가져올 잠재적인 대가는 14일 파키스탄 전역의 사원들에서 이뤄진 안식일 기도를 통해서도 감지됐다. 마울라나 압둘 아지즈는 이슬라마바드의 한 안식기도석상에서 "미국에서 발생한이번 테러는 미국이 그동안 회교권에 행한 행동에 대한 신의 응벌"이라고 평가했으다. 페샤와르의 이슬람 성직자인 하산 잔은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지하드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으며 수백명이 `지하드'를 외침으로써 그에 동조했다. 무샤라프가 약 2년전 무혈쿠테타로 집권한 이후 가난에 찌든 1천400만 인구의파키스탄 현대화 작업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견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왔고, 아프간과 접한 서쪽 국경지역 안보를 위해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는 한편 탈레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점도 그의 딜레마를 부채질 하는 요인이다. 반면 핵 무기 실험으로 인해 지난 1998년 미국이 취한 자국에 대한 경제 제재조치를 잊지 못하고 있는 파키스탄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진퇴양난에 처한 것은 탈레반도 마찬가지. 빈 라덴이 고용한 용병들로 아프간내 적대세력(反탈레반 세력)과 싸우고 있는탈레반이 빈 라덴을 미국에 인도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자살행위나 다름없지만, 수십년간의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민들과 민족주의자 사이에서는 빈 라덴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득세에 대한 반감 역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라마바드 = 연합뉴스) 이기창특파원 ikc@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