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꿈의 도시다.

거리에는 오색찬란한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호텔마다 차려놓은 카지노에서는 거액의 도박자금이 오간다.

그러나 카지노 세계가 라스베이거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금융센터로 불리는 월가도 "포장만 다를 뿐 도박판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소리를 듣는다.

월가를 본원지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아예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다.

판돈으로 치자면 월가쪽이 라스베이거스의 수천배에 달한다.

이 많은 자금중 상당량을 월가의 펀드 매니저와 브로커 등이 최근 개발된 새로운 "칩"을 통해 주무른다.

"파생금융"이라는 칩이다.

파생금융상품의 역사는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매사추세츠공대( MIT) 경영학 교수였던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즈에 의해 개발된 옵션거래의 가격결정 모델인 블랙.숄즈이론이 원조다.

이 이론은 90년대 들어 두 교수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주는 등 꽃을 피우지만 초기에는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90년대 이전까지 국제 금융시장은 개인투자자들에 의해 주도됐고, 복잡한 파생금융상품 이론이 동원될 만큼 주가 등 가격 변수의 움직임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개발된지 20여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된 것은 90년대 이후 국제 금융환경이 달라진 덕분이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국제 금융시장이 단일화되자 개인투자자들은 힘을 잃었다.

대신 개인들의 돈을 기금 형태로 모아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헤지펀드와 뮤추얼펀드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들 펀드의 생명은 투자 고객과의 신뢰 유지에 있다.

최소의 위험으로 가능한 한 많은 투자 수익을 내야 한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킨 것이 블랙.숄즈이론을 응용한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이다.

파생금융상품은 국제 금융시장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각종 펀드매니저와 브로커, 심지어는 개인투자자들도 정확하게 계산된 옵션을 활용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가격 등락에 따른 피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금융산업의 중층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요즘 국제 금융시장에 나와 있는 파생금융상품의 종류는 수천가지에 이른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된 통화스와프 통화선물 통화옵션 이자율스와프 이자율선물 선도금리계약 등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스와프.파생금융상품협회(ISDA)에 따르면 현재 파생금융상품을 통해 거래되는 자금 규모는 약 30조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파생금융상품은 월가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양한 투자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을 통해 전세계 자금을 월가로 끌어모으는 원동력이 됐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전지전능해 보이는 파생금융상품이지만 국제 금융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맥을 못춘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ISDA에 따르면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는 동안 파생금융시장 규모는 이전보다 약 40%나 축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가일층 타격을 가한 것이 지난 98년 8월 일어난 러시아의 채무상환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이다.

이 사건 이후 파생금융상품 시장 규모는 아시아 외환위기 이전의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파생금융상품이 위축될 때 월가의 위력은 더욱 발휘된다.

아시아 외환위기, 러시아 모라토리엄과 같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헤지펀드 등의 각종 기금들이 피해를 입으면 투자자들로부터 투자손실 원금을 보전하라는 ''최후의 통첩(margin call)''을 받는다.

해당 펀드들은 고객과의 신뢰 유지를 위해 이런 욕구에 응해야 한다.

문제는 최근처럼 글로벌 투자.기금 투자가 일반화된 시대에는 투자손실 원금을 보전하기 위해선 미국 이외의 여타 지역에 투자한 자금이 우선적으로 회수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국제 유동성이 위축됨에 따라 개도국의 금융위기가 심해지고 세계경제는 디플레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다.

최근 들어 개도국과 비정부기구(NGO)를 중심으로 선진국 위주의 세계질서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총회에 대한 반세계화 물결이 거센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월가''에 등을 돌리고 살아남기는 힘든게 글로벌화한 세계경제의 현실이다.

어떤 국가나 정치인과 기업인, 심지어는 개인들까지도 월가를 등지면 영원히 금융 낙오자로 찍혀 소생할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기 때문이다.

[ 특별취재팀 : 한상춘 전문위원, 이학영 차장(국제부), 육동인 특파원(뉴욕), 강은구(영상정보부), 김홍열(증권1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