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33년 미국의 상.하 양원은 카터 글래스 상원의원과 헨리 스티걸 하원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금융기관들의 이(異)업종 겸업을 금지하고 철저히 본업에만 주력토록 하는 법안이었다.

이른바 글래스 스티벌법은 미국 경제에 미증유의 큰 시련을 안겨준 대공황을 배경으로 태동했다.

은행들이 과도한 주식 투자로 증시 거품을 한껏 부풀렸고 그 결과 대공황의 씨앗을 잉태시켰다는 세간의 비난이 빌미를 제공했다.

글래스 의원은 은행들이 ''주식 도박''을 못하게끔 근본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법안 발의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로부터 67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 3월11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의회 지도자들은 금융기관들의 겸업을 허용하는 금융 현대화법에 서명했다.

워싱턴 정가의 글래스 스티걸 후예들이 70년 묵은 전통의 법규를 결자해지(結者解之)한 것은 시장의 요구에 떼밀려서였다.

신금융법은 은행들이 주식 도박을 하든,보험업에 손을 대든 일절 간섭하지 않고 금융기관 자율에 맡긴다는 행정부와 의회의 대(對)시장 항복선언이었다.

행정부와 의회가 공식적으로 글래스 스티걸법의 간판을 내린 것은 올들어서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금융기관들의 겸업화를 용인해 왔다.

지난 98년 4월 미국의 간판 은행그룹인 시티코프사와 보험·증권그룹인 트래블러스그룹이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인 7백64억달러 규모의 합병을 공개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시장의 흐름이 퓨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터에 정부가 금융기관들을 더 이상 전업(專業)의 올가미 안에 가두어 둬서는 안된다는 점에 국민적 합의가 이뤄졌던 것이다.

"정부가 시장의 흐름을 좇아 유연한 정책 처방을 취한 경우는 이밖에도 수없이 많다.

미국 정부는 정보통신 분야의 신기술 개발로 업종간 구분을 뛰어넘는 기업들의 제휴와 신규사업 창출이 잇따르자 발빠르게 정보통신산업의 규제완화를 단행함으로써 경쟁력을 배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줬다"

윤종록 주미 한국상공회의소 통신분과위원장(한국통신 뉴욕지사장)의 얘기다.

시장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민간의 창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손질해온 미국 정부의 경쟁 전략프로그램은 미국 경제를 라이벌 없는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는 디딤돌이 됐다.

전문가들은 국제무대를 평정한 미국 경제의 힘을 복합화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에서 찾는다.

세계은행의 국별 금융통계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말 현재 미국기업들의 채권 발행 잔액은 국내총생산(GDP)의 1백10%에 달한다.

반면 은행에서 차입한 자금은 GDP의 50%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들의 주된 돈줄이 간접 금융시장인 은행이 아니라 개인투자자들의 집합체인 증권시장이라는 얘기다.

이런 구조 하에서 기업들이 경영자금을 적기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특정 소수의 은행 관계자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증권 투자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내용있는 경영비전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구조조정을 펴나가는 등의 시스템을 확립할 수밖에 없다.

투자자들의 선택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미국식 경쟁 전략은 미 경제의 활력소인 하이테크분야 벤처기업들의 왕성한 창업배경도 설명해 준다.

포천지가 선정한 5백대 기업들이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4백여만명의 일자리를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현 실업률이 사실상 완전고용 수준인 4%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활발한 벤처 창업 때문이다.

민간과 시장의 효율에 자원의 최적 배분을 맡기는 미국의 시스템은 고성장 저물가 고용안정의 동시 달성이라는 신경제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