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9년 6월, 세계는 중국 텐안먼(天安門) 광장을 주목했다.

드넓은 광장에 젊음의 피가 뿌려졌던 "6.4 텐안먼 사태"가 진압된 후 시위대에 호의적이었던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정치생명이 끊겼다.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후임으로 지목한 인물은 당시 상하이(上海)시 공산당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74).

세계 언론들은 그에 대해 별달리 쓸 말이 없었다.

"과도기 체제의 출범" "덩샤오핑의 대리인"이라는 표현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10년이상 중국을 이끌어 왔으며 지금도 명실공히 최고의 권력자로 남아 있다.

정치적 카리스마가 약한 장 주석이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중국 전문가들은 "장 주석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들 둘러싼 상하이 정치세력(上海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덩은 91년 장 총서기 후임으로 상하이시장을 맡고 있던 주룽지(朱鎔基.72)를 베이징으로 불러 "경제 부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상하이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이 대거 중앙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상하이방은 중국권력의 핵심분야에 포진하고 있다.

공산당 최고 사령부인 중앙정치국상무위 6명중 4명이 상하이 출신이다.

장쩌민 주룽지 웨이젠싱(尉健行.69) 리란칭(李嵐淸.69)이 그들.

이중 리란칭은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중 하나로 주 총리와 함께 90년대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중앙정치국위원(총 15명)중에는 딩관건(丁關根.71) 우방궈(吳邦國.59) 첸지천(錢基琛.72) 황쥐(黃菊.62) 등이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딩관건은 상하이 인근 장쑤(江蘇)성 출신으로 장 주석의 교통대학 후배다.

저장성 출신인 황쥐는 지난 63년 칭화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상하이에서 활약, 상하이시의 최고 권력자(당서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무원(정부)도 다르지 않다.

내각을 진두지휘하는 주 총리를 비롯 리란칭 체지천 우방궈 등 3명의 부총리가 모두 상하이방이다.

특히 우방궈는 장쩌민과 주룽지가 중앙으로 불려간후 상하이시장 자리를 이었던 인물로 차기 총리감으로 꼽히고 있다.

이밖에 탕자쉬엔(62) 외교부장, 정페이엔(65) 국가발전계획위 주임, 천즈리(58) 교육부장, 쉬용웨(58) 국가안전부장, 위정셩(55) 건설부장 등이 상하이를 근거지로 자라온 정치인이다.

다이상롱(56) 인민은행장은 주룽지 총리가 상하이에서 끌어올린 사람으로 금융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상하이방은 정치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실익을 중시한다.

"믿고 따라온다면 중국을 상하이처럼 만들겠다"는 주 총리의 말은 이를 보여준다.

그들은 외교 협상능력이 뛰어나다.

외국인과의 접촉이 많으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쉬에치엔에서 첸지천을 거쳐 현 탕자쉬엔에 이르기까지 개혁개방이후 중국외교를 담당해온 인사들은 모두 상하이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