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85년2월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당시)가 파내 반란으로 위기를 맞았다.

다케시타 노보루 등이 결성한 "소세이카이"에는 오부치 총리와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당수도 참여했다.

다나카 총리는 "오야지(어른)에 두마음을 가져서야 되느냐"며 두사람의 이탈에 배신감을 드러냈다.

2월25일 하타 쓰토무(현 민주당 간사장)씨의 파티자리에서 다나카 총리는 "세대교체다. 다나카라고 도태하지 않는다고 할수 없다.
부르심이 있으면 신의 명령을 따를것"이라고 밝혔다.

이틀후 가쿠에이는 자택에서 쓰러졌다.

그가 실려간 앰뷸런스의 병원이름은 점착테이프로 가려졌다.

아무도 모르게 도쿄체신병원으로 옮겨졌다.

2000년 4월2일 새벽1시.

총리공관에서 한대의 경차가 빠져나와 준텐도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공개되지 않았다.

총리 주변에서 정보관리에 나섰다.

2일밤에 잡혀있던 총리의 결혼식 참석은 홋카이도 우수산 분화대책을 구실로 취소시켰다.

총리실은 "공관에서 자료정리를 하고있다"는 내용을 통신사측에 전했다.

총리부재는 2일 밤 11시30분이 돼서야 공표됐다.

쓰러진지 22시간만이었다.

다나카 전총리는 다케시타 전총리와의 싸움에서 쓰러졌다.

오부치 총리도 자유당의 연립이탈문제로 신경전을 벌인 게 화근이 됐다.

오부치 총리와 오자와 당수는 정치적인 뿌리가 같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골육상쟁을 벌여왔다.

오부치 총리는 "이치로 당수로 부터 총리총재로서 결단을 내리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자자(자민자유)연립과 보수신당 문제를 혼자서 결정할수 없다. 이치로 당수에게 자기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고 싶다"고 측근에게 밝혔다.

오부치 총리는 타고난 사교정치가로 통한다.

자선 콘서트에는 꼭 참석했다.

개호보험개시때도 고령자 서비스센터에 들렀다.

철저한 사교정치로 입지를 다져왔다.

이를 통해 "인품의 오부치"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이를 무기로 자자공(자민 자유 공명)연립도 성사시켰다.

오자와 당수의 외통수 개혁노선과는 처음부터 조화될 수가 없었다.

오부치 총리는 규슈 오키나와 서미트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왔다.

휴일인 3월25,26일을 활용,현지를 다녀왔다.

그 1주일후 갑자기 쓰러졌다.

사교정치의 최고무대인 서미트의 의장이 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다나카 전총리에 이어 오부치 총리도 파벌간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됐다.

일본정치개혁의 최대 장애물은 바로 파벌정치다.

도쿄=김경식 특파원 kimks@dc4.so-net.ne.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