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했던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월가 행렬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자산관리공사(구 성업공사)가 부실 채권의 할인매각을 위한 투자설명단을
이끌고 지난주 이곳을 다녀간 데 이어 이번 주에는 한빛은행 실무팀이 후순위
채권의 발행을 위해 뉴욕에 머무르고 있다.

벤처기업인 미래산업이 나스닥상장을 추진하기 위해 최근 월가를 다녀갔으며
포항제철도 10억달러 규모의 주식예탁증서(DR)를 발행하기 위해 실무자들이
분주히 뉴욕을 오가고 있다.

지난해 9월 현대자동차가 5억달러 어치의 DR를 발행한 이후 개점휴업 상태에
있던 월가 증권가의 코리아데스크들도 덩달아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인 이런 움직임과 달리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펀드 매니저와
기관투자가 등 월가 코리아 워처들의 시선은 심상치 않다.

"한국은 믿기 힘든 나라"(I펀드 S사장)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까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월가 투자가들이 오랫동안 기대를 걸었던 한국 정부의 공기업지분 해외매각
공약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중으로 예고됐던 담배인삼공사와 가스공사의 DR발행 계획이 주가
약세 등을 이유로 취소된 데 이어 공기업 민영화 프로그램 자체의 궤도수정
까지 거론되면서 월가의 이런 의구심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이들이 더욱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은 한국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궤도 수정의
이유들이다.

외화가 과잉공급돼 있는 상황에서 공기업 주식의 해외 매각이 가져올
환율상승 요인을 배제해야 한다거나,공기업 DR가 최대한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매각시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등의 논리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정도는 공기업의 민영화계획을 짤 때 충분히 감안됐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구실로 대외적인 약속을 뒤집는다면 앞으로 한국정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특히 정부의 책임있는 당국자가 "우량한 공기업을 굳이 해외에 매각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국부의 해외유출 타령
이냐"는 냉소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B투자은행의 한국계 펀드매니저는 월가비즈니스의 기본은 장기적인 신뢰관계
구축이라며 경기가 나아졌다고 한국정부가 쉽게 말을 바꾸는 것으로 비쳐져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당장의 정책적 편의를 탐해 국가적 신뢰를 스스로 허무는 소탐대실의
자충수를 둬서는 안된다는게 월가의 충고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