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000년을 코앞에 둔 999년의 유럽.

문헌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말 그대로 "혼돈"이었다고 전한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예언이 중세인들을 공포로 몰고 갔다.

"천상에서 천사가 내려오고...늙은 뱀이며 악마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년동안 결박하여...사탄은 그 뒤에 잠시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다"는
구절이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유럽 대륙을 뒤덮었다.

그동안 진행됐던 대부분의 일이 중단되었고 기독교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구원을 호소하는 광란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가 넘어가도 종말이나 말세란 없었다.

사람들은 "행복한" 결말에 안도의 숨을 쉬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분출했다.

이후 흑사병이 돌기 시작한 1300년대까지 유럽은 가장 진보적인 시기를
보냈다.

2000년을 눈앞에 둔 지금 시애틀에서는 또 다른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전세계 3천여개 비정부기구(NGO)에서 온 5만여명의 환경보호론자와
노동운동가들이 "노(NO) 자유무역, 노 WTO"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초 평화롭던 시위양상은 회의가 개최되자 방화와 투석전이 뒤섞인
폭력시위로 발전했다.

시위대 때문에 WTO협상 개막식이 연기됐고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

게다가 시위대는 "파룬궁 합법화"나 "티벳 독립"같이 WTO와 전혀 무관한
문제까지 들고 나와 가뜩이나 복잡한 시위양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WTO에 참가하는 정부대표들도 우왕좌왕이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무역규범을 만들자고는 하면서도 협상 의제는 물론
"일괄타결 방식"이냐 "분야별 협상"이냐 하는 협상방식도 확정짓지 못했다.

심지어는 뉴라운드의 명칭을 놓고도 싸움박질이다.

유럽에선 "밀레니엄 라운드"를, 미국측은 "클린턴 라운드"를 고집하고 있다.

개막 이전부터 "협상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시애틀을 걱정스런 눈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3년기한의 뉴라운드 협상은 시작될 것이고 새 천년의 상황에 맞는
자유무역규범도 마련될 것이다.

또 협상국들은 의제에 "극성스런" NGO들의 주장도 포함시키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따라서 지금 시애틀에서 벌어지는 혼란 상황은 새로운 희망의 시대로
넘어가는 막바지 진통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갖는다.

게다가 1천년 전같이 말세론이 세상을 뒤덮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 박수진 국제부 기자 parksj@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