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번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아마도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대선은 한마디로 그들의 이상과는 전혀 다른 "요지경"속이었다.

그것은 배반과 음모, 극적반전과 폭력으로 점철된 "후진 민주주의"의 전형
이었다.

집권당 후보 선출과정은 그 중의 하이라이트.

골카르당은 선거 직전까지 후보선출을 놓고 옥신각신 하다 결국 후보지명을
포기하고 말았다.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내지 못하는 웃지못할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대통령 자리는 결국 전혀 예상밖의 인물에게 돌아가는 극적 반전으로 일단락
났다.

원래 민주주의는 "때깔만 좋은" 이념이라고들 한다.

"시민이 주인"이라고 하지만 유권자가 주인 대접받는 때는 선거기간 뿐이다.

그것도 한정된 범위내에서만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데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아크로폴리스로 몰려가 "직접 민주주의"를 외쳐댔다.

시민의 권리를 하나라도 더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은 불행하다.

간접선거로 지도자를 뽑은 것도 그렇지만 그나마 선거인단조차 제 역할을
못했다.

항간에서는 일부 후보가 선거막판에 엄청난 돈을 뿌려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선거에 참여하는 11개 정파도 이해득실만 따지며 선거를 막판까지 혼전으로
몰고 갔다.

선거판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수백년간의 식민통치와 33년간의 독재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지난 59년 독립한 후 잠깐동안 "개도민주주의"라는
변형된 형태를 경험한 게 민주주의 역사의 전부다.

이번 선거는 인도네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 후에도 인도네시아의 앞날은 여전히 험난해 보인다.

선거후 정국혼란은 차치하더라도 인도네시아는 민주주의를 지탱할 지식.
중산층이 얇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만에 하나 수하르토 같은 독재 세력이 나타나도 이를 막을 민주세력층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런 인도네시아를 보다가 눈길을 한국으로 돌린다면 또
어떤 느낌을 받을까.

총선을 앞두고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경제상황이나 선거때마다 계속되는
금권타락 시비, 목소리만 큰 국감장 표정, 비리와 부패로 찌든 지도층의
모습은 과연 인도네시아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 박수진 국제부 기자 parksj@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