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 숨을 거뒀다".

일본의 언론들은 3일 소니의 공동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의 죽음을 이렇게
보도했다.

약관 25세에 소니를 창업, 일본 전자산업을 세계 최일류로 끌어올린 주역의
타개를 "전자산업의 죽음"으로 표현하여 애도한 것이다.

모리타 아키오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그룹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혼다그룹 창업자)등와 함께 경제대국 일본의 오늘을 있게 한 탁월한 경영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항상 첨단의 전자제품을 개발, "기술력의 소니"란 시장의 신뢰를 확고히
구축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경영자중 국제적 감각이 가장 뛰어나다는 명예로운
평가를 받았다.

모리타는 1921년 나고야의 한 중류가정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가업(주류도매업)을 잇는 작은 경영자였다.

그는 어린 아키오에게 "너는 날 때부터 사장이다. 또한 집안의 장손이다"는
말로 책임의식을 각인시켰다.

모친은 개화된 여성이었다.

서양고전음악을 좋아해 집안에는 축음기와 많은 레코드판이 있었다.

아키오가 음향기기사업을 생각한데는 이같은 배경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모리타는 중.고교시절 물리학에 재주를 보였다.

경제학을 하지 않는 아들에 대해 부친은 실망했지만 그는 물리학자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현대물리학으로 각광을 받던 오사카대학(당시는 제국대학)으로 진학했다.

전쟁은 그러나 모리타에게 학자의 길을 걷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B-29가 도쿄를 공습할 무렵 나는 군에서 열유도 장비나 야간사격무기
등을 개발중이었다"고 회고한다.

모리타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46년이다.

그는 같은 해군기술장교 출신의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도쿄통신공업(소니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부카는 탁월한 엔지니어였으며 모리타는 전략적인 경영을 할 줄 아는
마인드를 가졌다.

초라한 "마치고바"(정공장 :길거리 공장)에서 "세계의 소니"가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54년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개발은 도약의 발판이 됐다.

모리타는 곧바로 미국시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는 폐허가 된 일본의 소비자들이 성능좋은 전자제품을 살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회사이름을 바꾼 것은 이 무렵(58년)이었다.

소니(소리를 뜻하는 라틴어 어원 "sonus"에서 따옴)는 소형 TV에 이어
비디오테이프레코더(VCR)를 히트시켰다.

재정과 영업활동을 총괄했던 모리타는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
공격적인 시장개척의 선봉역을 자임했다.

이후에도 "남들이 꿈꿀 때 이미 만들고 팔았을 정도"로 소니는 앞서
나갔다.

소니가 오늘날과 같은 세계초일류 기업이 된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워크맨의 성공"이었다.

모리타는 시장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참모들의 지적을 물리치고 워크맨을
터뜨리도록 지시했다.

그는 "소비자가 모르는 새로운 개념의 제품에 대해 무슨 시장조사가
가능하냐"며 수요창출의 마케팅을 강조했다.

일본 기업으로는 최초로 70년 뉴욕증권거래소 상장되고 72년 현지공장을
완성한 소니는 "일본기업의 미국역공"을 상징하는 심볼이 됐다.

모리타는 일본의 보수논객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지사와 함께 "NO라고
말 할 수있는 일본"이란 책을 내놓아 경제대국이 된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세우는가 하면 "회사중심의 폐쇄적인 일본식 경영에 문제가 있다"(문예춘추)
는 글을 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93년 11월 일본의 재계 총수자리인 게이단렌 회장취임을 앞두고
뇌출혈로 쓰러지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일년뒤 회장을 끝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미국 하와이와 도쿄시내
병원에서 재활과 요양을 받아왔다.

< 박재림 기자 tr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