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보고서에 대한 우리의 지대한 관심에 비해 미국 현지의 표정은 차라리
싱겁기까지 하다.

이곳 시간으로 14일 미정부는 미국 기자들만을 불러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이 그의 보고서를 15일 의회에 보고할 예정이라는 사실과 대강의
내용들을 브리핑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를 비중있게 다룬 미국신문은 별로 없었다.

다루었어도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성의없이 취급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정치권력구조상 대북 경제제재완화는 클린턴정부의 희망사항
(wishful thinking) 일 뿐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의회는 코방귀만 뀌고
앉아있기 때문이다.

하원에서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다루고 있는 국제관계위원회 벤자민 길먼
위원장은 15일 페리의 비공개보고를 받고 난 직후, 페리보고서에 대해
즉각적으로 부정적 반응을 나타냈다.

같은 시간, 상원에서 이 문제를 관장하고 있는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제시 헬름스 상원외교위원장을 방문한 기자가 페리보고서에 대한 반응을 묻자
헬름스 위원장은 페리보고서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기자가 어리둥절해서 말을 못하고 있자, 옆에 앉아있던 보좌관이 "페리가
작성한 대북 정책보고서이며 페리가 내일(16일) 직접 방으로 보고를 하러 올
것"이라고 귀띔해주자 그제서야 그러냐고 답하는 것이었다.

페리는 공화당주도의 의회가 퍼붓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클린턴이 세워놓은
방화벽(fire wall)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북한에 관한한, 행정부와 의회가 그만큼 먼 거리를 두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행정부차원에서 하는 제재완화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북경제제재 완화가 효력을 발휘하자면 의회가 최소한
대외원조법과 수출입은행법을 개정해야 한다.

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미국 수출입은행의 보증, 대북한원조, 국제
금융기관에서의 차관 및 사업 지원 표결 등을 위해서는 최소한 의회의 반대가
없어야 한다.

햇볕정책이 햇볕을 보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이다.

워싱턴 한국 기자들중에는 페리보고서의 진본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윌리엄 페리 대북조정관이 손수 들고 다니며 관련 의회지도자들에게만 보여
줄 뿐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보고서라기보다는 18장짜리 유인물에 불과하다는 후문이
전부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