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주재원들에게는 두가지 직업이 있다.

회사 본업과 관광 안내업이 그것이다.

주재원들은 요즘 부쩍 바빠졌다.

외환 위기 직후 한동안 뜸했던 본국 손님들의 행렬이 요즘들어 꼬리를 잇고
있는 탓이다.

은행이나 대기업 주재원들은 많을 경우 1주일에 2~3팀씩의 본국 출장자들을
챙기고 있다.

저녁시간과 주말을 송두리째 반납해야 하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주재원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다.

뉴욕을 찾는 본국 고위 인사들의 간담회 강연회 후원회 등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일이다.

물론 이런 행사들 중에는 참석자들이 유익했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본국 소식이 궁금한 차에 행사 참석을 통해 이런 저런 귀동냥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의 강연이나 행사에 들러리로 동원되는
경우다.

8일 오전(현지 시간) 뉴저지 포트리의 힐튼호텔에서 전윤철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이 강연을 맡은 은행지점장 등 업계 대표와의 조찬 간담회도 그랬다.

이 자리는 시종일관 재벌개혁 등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전 위원장의
메시지 전달로 일관됐다.

전 위원장은 대기업 그룹 총수들에 대해 "온갖 뒷조종을 다하면서 책임은
안지는 재계의 호메이니옹들" 등으로 지칭하며 "능력이 없는 호메이니옹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는 등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개혁 시책의 당위성을 강조한 대목에서는 최근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화제에 올랐던 일본인 평론가 오마에 겐이치까지도 여지없이 무식한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이날 간담회는 오전 7시에 소집됐다.

상당수 주재원들은 아침잠까지 설쳐가며 참석했지만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을
뿐 궁금한 점을 묻거나 자신들의 생각을 전할 기회는 전혀 갖지 못했다.

이날 그가 토한 열변의 내용 대부분은 이미 신문 지상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는 것들이었다.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으로, 듣는 귀는 열지 않은 채 무엇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주재원들을 불러모았는지 참석자들은 의아해했다.

우리나라가 외환 위기를 맞은 원인 중의 하나로 민관을 막론하고 고위
책임자들이 남의 소리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뉴욕 주재원들은 자신들이 이곳 글로벌 비즈니스 전장의 최전선에서 겪고
느낀 것들을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줄 공직자들의 내방을 기다리고 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