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정의만이 진리인가"

국제 회계기준의 통일 방안을 놓고 미국과 샅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유럽쪽 전문가들 사이에서 요즘 이런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각국의 기존 회계 방식을 한가지로 통합한 국제 회계기준 위원회(IASC)의
통일안에 대해 미국이 완강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대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의 회계 규범인 GAAP에 비해 IASC안이 너무 느슨하다는 것이다.

자산과 부채의 각 항목에 대해 기업들의 "재량"을 너무 많이 허용하고 있어
자칫 대규모 회계 조작을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따라서 IASC의 통일안이 자국 방식을 보다 많이 수용하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에대해 IASC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측이 발끈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럽은 IASC안이 지나치게 느슨하다는 미국측 지적에 대해 "설득력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예컨대 기업간 합병에 따르는 회계 처리 등의 분야에서는 IASC안이 미국의
GAAP방식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반대 논리에도 아랑곳없이 미국측은 "실력 행사"도 불사한다는
방침이어서 상황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별개의 세계 회계표준기구를 설립, 미국식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세계
표준안을 마련하는 방안까지 검토중이다.

호주 캐나다 등 "친미" 국가들은 물론 유럽내 영국 독일조차 미국의 "포섭"
대상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이다.

유럽측은 이에 대해 IASC안을 세계 표준방식으로 일방 선포하는 등의 대응
방침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칫 세계 금융-증권시장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회계 언어"가 대립하는
최악의 사태마저 일어날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간의 갈등이 어떻게 귀결되건, 국제회계 기준의 통일 자체는
시급히 서둘러야 할 과제라는 게 세계금융계의 일치된 지적이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회계 방식이 도입될 경우 97년 한국 태국 등 아시아 각국
을 파국 일보 직전으로까지 몰아넣었던 대형 외환 위기를 앞으로는 국제
사회가 사전에 충분히 감지, 공동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인터넷 출현으로 계량할 수 없는 무형의 기업자산이 늘어나는 등 기존의
회계 방식으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변화가 일고 있는 점도 새로운
통일안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국제회계 기준 통일을 놓고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중남미 등은 물론 유럽기업들까지도 필요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 금융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90년에 80억달러에 불과했던 외국 기업과 공공기관들의 미국내 자금 조달
규모가 97년에는 1천2백80억달러로 불과 7년새 15배 이상 불어났을 정도다.

전세계에서 조달되는 자금의 절반 이상이 월가를 중심으로 한 미국 자본시장
에서 나오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에 따라 "자발적으로" 회계 처리 기준을 미국의 GAAP 방식으로 변경한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기업들이 적지 않다.

월가의 "금융 파워"가 미국식 회계방식을 사실상의 세계 표준안으로 바꿔
나가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미국과 맞서고 있는
유럽의 "항전"은 결과가 이미 예견돼 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경제강국으로 군림하는 한 "US스탠더드=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등식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인 모양이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