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독립기념 2백22주년을 축하한 미국에서는 눈길을 끄는 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미국 성인의 70%가 "부"나 "신앙심"보다 "애국심"을 더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애국심을 지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는 이 응답비율은 역대 조사결과
중에서도 가장 높았다.

냉전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미국인들 사이에 애국마인드가 한창 고조됐던
77년에도 애국심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응답은 43%에 불과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글로벌"이 보편적 가치로 강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조사결과는 의외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더구나 지금은 과거 미국인들을 애국심으로 뭉치게 만들었던 소련과
같은 적국도 사라진 시대다.

그러나 이런 의문을 풀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나 정치적 리더십에 환호하던 70-80년대의
애국심과 요즘의 그것은 차원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마이크로
소프트와 디즈니랜드, 페더럴 익스프레스가 미국의 기업이라는 점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는 한 미국 중산층의 설명은 요즘 미국에 일고있는 신애국
물결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정치가 아닌 경제적 부강이 미국인들을 새로운 애국심으로 단결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세계무대를 평정한 경제력의 여세를 몰아 "미국식 시스템"을 지구의
표준으로 정착시키려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전략도 미국인들의
신애국주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자유시장경제를 저변에 깔고 있는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는 관주도
중상주의를 "아시아적 가치"로 신봉해온 일본과 한국 등 동아시아 경제의
도미노식 붕괴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외환시장을 완전 자유화하고, 자본시장을 미국식 시스템에 맞춰 전면
개방하며, 기업회계도 "투명"이라는 이름아래 미국식으로 개조하라는
요구를 내놓는데 거침이 없다.

지난 주 베이징을 방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유일한 잠재적
라이벌인 중국의 안방에서까지 미국식 "인권"의 잣대를 들이대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세계 곳곳에 전파하기 바쁜 미국의 이런 모습에 대해
독선과 독주의 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세계곳곳에서 벌어져 온 치열한 경제전쟁의 결과
명확하게 승자와 패자가 갈라진 현실 앞에서 이런 비판론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최근 발표한 포항제철 등 굵직한 공기업 민영화 조치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의 잣대로 보면 당연히 밟아야 할 수순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월가 자본가들에게 "전리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식 처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 4일 밤 맨해튼 번화가의 상징인 메이시 백화점과 자유의 여신상이
마주 보이는 리버티 공원 등 미국 전역에서 쏘아 올려진 수천 발의
독립기념일 폭죽은 "글로벌 스탠더드의 승리"에 대한 자축도 겸한 것 같아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