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대통령이 워싱턴에서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영접을 받고 있다.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 조지워싱턴대학 명예박사 학위 등 보기 드문
영예를 누리고 있다.

한마디로 열렬한 환대다.

하지만 미국 기업인과 월가의 시선은 다른 데로 쏠려 있다.

과연 한국이 위기탈출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특히 기업및 금융기관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이
그들의 관심사다.

"외국기업도 한국에 들어와 있으면 한국기업"이라는 김 대통령의 강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총론보다는 각론"을 주문하는게 그들이다.

무엇보다도 물건을 팔려는 쪽의 자세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게 미국
경제계의 인식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챙기는 가장 중요한 것은 크게 두가지다.

명쾌하게 정리된 문서(document)와 가격(price)이다.

집을 팔려면 집문서가 있어야 한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경우에도 저당설정에 필요한 서류가 완비되어 있어야
한다.

하물며 수백 수천배 규모의 기업을 사고 팔려는 경우 제대로 된 문서는
절대적이다.

제대로 된 회계장부.

이것이야말로 우리경제를 풀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고 기업들이 빠른
시일내에 구비해야 할 조건이다.

기업회계장부는 투명해야 하며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국제기준에 맞아야
한다.

이것저것 숨겨놓은 것이 많고 의심을 살만한 구석이 있는 것은 내놓으나
마나다.

의심가는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 들면 외국인들은 좋다 싫다 말없이 등을
돌려버린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합재무제표작성기준조차 만들어 놓지
못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는 만들어 놓겠다는 계획이 고작이다.

원칙 만드는데 1년을 소비하고 또 이 원칙에 따라 각 기업들이 장부책을
쓰기 시작하다 보면 이미 손님들은 떠나고 없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가격이다.

가격이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격결정은 주로 투입한 원가(replacement costs)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흥정은 주로 미래 수익을 현가화한(present value of
future cashflow) 것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건물을 짓느라 들어간 원가가 1백억원이었다면 여기에 약간의
이익을 붙여 1백10억원을 부르는 것이 통례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가격결정 모형은 그렇지 않다.

매년 들어 올 임대수입과 미래의 매각금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가격을
친다.

이 둘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많은 기업들이 물건을 내놓고 있지만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투입한 원가를 송두리째 포기하고 현실가격을 수긍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Market price)이야말로 준엄한 현실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인식전환이 위기 탈출의 총론이자 각론이다.

양봉진 < 워싱턴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