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는 과연 미덕인가.

월가에서는 요즘 이 해묵은 명제가 새삼 화두가 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에선 "역시 그렇다"이다.

수출이 시들해지고 증권시장마저 기우뚱거리기 시작한 5월에도 미국의
실업률이 4.3%에 머문 비결은 바로 "소비"에 있다는 분석이다.

소비가 미국경제를 떠받치는 새로운 주역임은 몇 가지 지표로도 확인된다.

백화점 등 대형 소매점포들의 매출은 4월에 10.2% 증가한 데 이어
지난 달에도 7.1%의 견실한 성장세를 지속했다.

제너럴모터스(GM) 등 자동차 3사의 지난 달 승용차 판매 실적은
12년만의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주택시장도 판매관련 지표에 "사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공전의 호황을 지속하고 있다.

여기에 기업들의 설비구입 등 "투자성 소비"도 한몫 거들고 있다.

기계설비 수주규모가 올 1.4분기 중에 무려 27%나 늘어난 데 이어
2.4분기에도 두 자리수의 신장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반면 소비부문을 제외한 미국의 거시경제 지표들에는 빨간 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9,000 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대망의 10,000선마저 연내에 돌파할
수 있으리라던 다우존스 주가지수는 요즘 8,000대로 내려 앉았다.

아시아 경제위기가 러시아마저 수렁에 빠뜨리는 등 확산 일로를 내닫는
가운데 그 불똥이 미국 수출업계에까지 튀고 있어서다.

항공 전자통신 등 수출비중이 높은 상당수 제조업계가 재고누증과
생산감축 등으로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다.

그 여파로 지난 2년 동안 30만명을 신규 고용했던 제조업계가 최근엔
두 달째 일자리를 순감시키고 있다.

하지만 왕성한 소비가 그 뒤를 버텨주고 있다.

유통업계의 나래를 펴주고 운송 금융 등에까지 활력을 불어넣는 등 경기
선순환을 견인하고 있다.

실제로 5월중에 제조업 쪽에서 2만6천명의 일자리가 줄어들었지만 유통과
금융 운송 등의 순항에 힘입어 전체적으론 33만2천명 몫의 고용이 새로
창출됐다.

미국인들의 소비가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물론 8년째 지속돼 온 경기호황
덕분이다.

전통적으로 소비를 "미덕"으로 여겨 온 미국인들은 지난 5년간 평균
저축률을 6.5%에서 3.5%로 떨어트리면서 "돈 쓰기"에 열을 올려 왔다.

그 바람에 미국 경기가 요즘 누리고 있는 "부의 소비효과"는 무려
2천억달러에 이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적절한 소비로 경제전반에 새로운 순환을 일으키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저축 만을 "지상의 미덕"으로 여겨 온 "아시아적 가치"와 대비돼 주목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세계 최대의 무역흑자국이자 최고의 저축률을 자랑해 온 일본이 바로
저축 일변도로 인한 소비부진으로 최악의 경기침체에 빠진 것과 대칭되는
그림을 보여준다.

때마침 뉴욕을 방문중인 김대중 대통령은 7일오후(현지시간)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일본을 보니까 국민들이 돈을 움켜쥐고 안 내놓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절약도 적당히 해야지,너무 하면 곤란한 법"이라며 국내 일각의
"과소비 논란"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미국과 일본의 상반된 경기상황과 맞물려 "소비의 역할"을 새삼 생각케
하는 장면이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