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도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서방 7개국(G-7) 등이 한국에 1백억
달러를 조기지원키로 합의했다.

이에따라 "국가부도위기" 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한국의 경제위기는
한고비 넘기는 양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지원은 금융 등 모든 경제분야에 대한 한국정부의 과감한
개혁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개혁추진이 이들의 기대에 못미칠 경우 어떤 일이 또 발생할지 아직
예단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개혁은 어떤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할까.

이번에 자금을 지원키로한 나라들은 어떤 개혁을 원할까.

뉴욕 도쿄 런던 파리 밴쿠버 등 주요 자금지원국가들에 파견되어 있는
특파원들을 통해 바람직한 개혁방안을 알아본다.

<국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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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

[ 뉴욕=이학영 특파원 ]

"한국이 금융.외환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시장 기능에 따라야 한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최근 한국의 정부채권
신용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인 B+로 4단계나 하향 조정하면서 이같이 한마디
했다.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고 있는 금융기관은 과감히 시장 원리에 따라 정리
해야 비교적 건실한 다른 금융기관들이나마 살릴 수 있고 그에 따라 금융
시장에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아직도 대형 금융기관들을 정리하는데 따라 금융시장이
단기적으로 겪게 될 충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갖가지 명목의 지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 결과 한국의 금융계 전체가 부실의 거센 소용돌이에 빠지는 "부실의
일반화"현상이 초래됐고 결국 조기에 진화할 수도 있었을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

미국 회계법인인 코퍼스 앤드 라이브랜드의 한국담당 컨설턴트인 로버트
굴드는 "한계 기업들을 잘라내고 무모했던 투자를 거둬들이며 자생력을 잃은
금융기관을 시장 원리에 따라 도산시키는 등 근본적인 개혁을 서두르는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며 "당장의 고통 때문에 이런 작업을 미적거릴 경우 한국
경제는 금명간 고꾸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장도 이같은 이코노미스트
들의 경고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최근 뉴욕 경제인클럽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아시아
국가들이 과감한 개혁의 칼을 대지 않는다면 이번 위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런 작업이 전제되지 않는한 국제통화기금(IMF) 등 외부 금융기관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빨리 대준들 이들 국가를 구조적 위기에서 건져낼 수는
없으며 단지 모순의 기간을 연장시켜 주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 일본 ]]

[ 도쿄=김경식 특파원 ]

일본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금융위기가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며 시급히 구조개편에 나서야 한다고 하나같이 지적하고 있다.

와타나베 도시오 도쿄공업대 교수(개발경제학)는 IMF와 미국 일본 등이
잇따라 자금지원을 발표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원화 및 주가폭락 등 경제불안
이 가중되고 있는 것은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적인 불신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기업그룹들의 정보공개가 지극히 불투명하다"며 "채무가 2천억달러
에 이를 경우 IMF의 지원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 상태로는 IMF지원계획이 돌솥의 물처럼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이번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기업그룹들의 재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삼성이 이미 내년 투자계획을 30% 줄이기로 한데 이어 다른 대기업그룹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와카스키 미기오 일본종합연구소 이사장은 IMF를 중심으로한 국제적인
금융지원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금융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정부
은행 대기업그룹 등이 유착된 한국경제구조가 발본적으로 개혁될 수 있을
지의 여부에 대해 시장이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이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재정금융긴축정책과 은행부문의
효율화 등 IMF가 제시한 경제구조개혁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교수는 한국 경제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대기업그룹의 과잉투자를 꼽고 있다.

오코노기 교수는 "한국의 연말 자금조달이 아주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며 해외로부터의 신뢰감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해외로부터의 불신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국내에서도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후카가와 유키코 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 주임연구원은 불량금융기관의
처리는 일단 금융기관의 대출기피가 해소된 다음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내년부터 시작되는 구조조정과정에서 IMF에 보다 투명한 계획을
제시하는 한편 성장잠재력이 상실되지 않는 선에서의 경제운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IMF측을 설득시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영국 ]]

[ 런던=이성구 특파원 ]

"한국이 심각한 금융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외신뢰도
회복이 급선무이다" "짐이 되는 기업이나 은행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최근 한국의 경제난에 대해 런던 금융가가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해법이다.

미들랜드은행의 아시아지역 매니저는 "현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초단기 처방은 국가 신뢰도 회복"이라며 "이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하루빨리 미국 일본 등을 방문해 구제자금을 확약받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네트웨스트은행의 아시아담당 관계자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해 이들 우방국가로부터 예컨대 "한국의 지급불능사태를 좌시
하지 않겠다"는 식의 보증수표를 받는 일이 대외 신뢰도를 회복하는 지름길"
이라고 말했다.

런던 금융가는 또 부실한 개별기업이나 은행은 국가 전체의 부도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버릴 것은 빨리 버려야 한다"(미들랜드은행 관계자)는 것이다.

따라서 기아자동차를 국영화한 것이나 서울 제일은행을 국책은행화한
정부조치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개별기업이나 은행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리스크를 사회전체가 분담하는
(socialized) 것은 잘못된 관행이라는 게 런던 금융가의 지적이다.

네트웨스트은행 관계자는 "주요 서방은행들이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지역
전체에 대한 단기여신을 연장하지 않고 연말까지 회수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은행의 톱 매니저들이 연초 주주들로부터 재신임을
받기위해 연말에 리스크가 높은 여신은 가능한한 거둬들이는데 이는 관례상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방은행들은 적어도 내년 1월 중순 이전에는 한국계 은행에
대한 크레디트를 재개할 가능성이 없다고 그는 전망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최근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지점 관계자들이
단기부채를 연장해 주도록 서방은행 본점에 요청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
이라며 "서방은행들이 몇개월만이라도 연장해주면 한국으로선 큰 위기를
일단 모면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 프랑스 ]]

[ 파리=강혜구 특파원 ]

지난 11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지원발표이후에도 한국경제상황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되자 프랑스는 한국 금융위기가 유럽에 미치는
영향과 한국의 경제전망을 다각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한국이 국가도산이라는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점을 감안, IMF와
G7이 1백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데 대해 프랑스 금융 전문가들은
"이 조치가 단기적인 부도방지 처방은 될 수 있지만 근본적 치유책은 될 수
없다"며 "IMF 공약 실천안이 장기적 안목의 한국경제위기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소시에테 제네랄은행의 한 증권분석가는 "김대중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며
"그러나 근본적인 제도개선은 하지 않은채 위기만 모면하려 든다면 비록
이번 사태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제 또다시 이런 위기가 재발하게 될지
모른다"고 충고했다.

그동안 프랑스 언론은 기업 연쇄부도와 기하급수적인 부실채권을 안고
있는 한국경제 위기를 비관적 관점으로 다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일부 경제전문가들과 한국학 학자들은 현 한국위기가 재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한국경제를 악화시킨 주 원인인 금융기관의 재무구조와 금융감독체계
등 금융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을 통한 체질개선에 성공하면 한국은 어떤
환경에도 대처할 수 있는 건강한 재무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국립 동양어대학교 대학원장 즈와이유 교수는 "한국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경제신화를 이룬 한국은 비록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재도약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고 믿는다"며 "IMF 경제체제를 국가적 수치로
여기기보다 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현명함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 캐나다 ]]

[ 밴쿠버=정평국 특파원 ]

"일본으로부터 배운 악습에서 빨리 벗어나라"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의 회생을 위해 캐나다 전문가들이 제시하고 있는
갖가지 충고의 최대공약수는 이 한마디다.

캐나다 유일의 전국지를 자처하는 글로브 앤드 메일, 아시아지역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밴쿠버 유력지 밴쿠버선 등 캐나다의 주요 신문들은
"일본처럼 꾸물거리지 말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속히
경제개혁을 단행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경제성장의 모델을 일본에서 구했던 한국은 그 과정에서 과도한 정부규제,
방만한 기업구조, 왜곡된 금융체제, 형식적인 시장개방 등 일본의 나쁜 습관
까지 그대로 답습했고 이제는 이의 청산이 시급한데도 일본처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으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개혁을 늦출 경우 현재의 일본처럼
경제회생이 몇년동안 지연되리라는 것이다.

캐나다 신문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 "기술개발이나 생산성향상보다는
특정산업에 대한 대규모투자에 의해 얻어진, 말하자면 착상(inspiration)이
아니라 땀(perspiration)에 의한 결과"라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논평이나
진단을 크게 보도함으로써 우회적으로 그들의 시각을 내보이기도 했다.

캐나다 임페리얼상업은행(ICBC)의 투자전문 자회사 총책임자인 피터
아이프씨는 "한국정부의 최대 과오는 은행들로 하여금 특정산업, 심지어
특정회사에 대출하도록 개입한 점이다.

일부 대기업그룹들의 도산은 이 때문이었다.

일례로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거미줄같은 규제와 높은 세금을 통해 외국의
자동차회사들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분석가들은 한국정부가 국제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을 도산케하는 대신
오히려 지원함으로써 구조적 문제들이 너무 오랫동안 곪도록 만들었고
급기야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마저 국내외에서 고전하도록 조장했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