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없다"

최근 일련의 금융위기를 맞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미국 금융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충고다.

"점진적 개선"이라는 미명아래 "핵심 비껴가기"를 택함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식 해법을 답습하지 말라는 얘기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9일자 1면 특집기사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지난 95년
외환-금융위기를 극복해 낸 "맥시코 해법"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유용한
타산지적이 될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멕시코가 불과 2년 전의 혼란을 딛고 올해 연 7%의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게 한 "멕시코식 금융해법"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멕시코 정부는 94년말 환율 폭락을 동반한 외환 위기가 밀어 닥치자 금융
기관 구조개혁을 통한 정면 돌파를 결심했다.

그리고 검사 출신인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를 금융감독원장에, 역시 금융
기관 근무 경험이 전무한 2명의 "아마추어"를 부원장으로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멕시코의 금융위기가 절정을 치달은 95년 3월에 이들 "아마추어 트리오"의
효용성은 정확히 입증됐다.

이들은 부실자산 규모가 큰 은행들에 대해 적립금을 대폭 늘리도록 하는
명령을 발동했다.

관련 은행들로 하여금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들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을 동원하건 간에 신규 투자자를 확보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 결과 18개 은행 가운데 10개 은행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거나 다른
국내 은행에 합병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겪었다.

이들은 이어 대형 은행들에 일체의 사전 예고없이 30명의 감사요원을 전격
투입하는 식으로 경영정상화과정을 수시로 점검했다.

지난 1월에는 보다 강력한 금융법규를 도입, 은행들로 하여금 채권 투자
등 자산 운용관련 정보를 증권시장에 정례 공개토록 했다.

이와함께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은행 부실자산을 정부 회계로 상각 처리,
은행들의 환부를 도려낸 뒤 자력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은행들을
과감하게 시티뱅크 등 외국계 은행에 매각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최근까지도 은행들의 실을 덮어버린채 정부
지원을 통해 환부를 봉합하려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이에따라 일본 은행들은 대출 관행을 개선하거나 적립금을 늘리는 등
"고통"이 수반되는 근본적인 경영대책을 시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처럼 두 시스템을 비교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과 멕시코는 정반대 방향의 도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이라고 비유했다.

"멕시코 노선"은 처음 얼마동안은 아주 울퉁불퉁한 길로 펼쳐져 있는 반면
"일본 노선"은 얼핏 보기에는 미끈해 보이지만 몇년을 달려가도 종착지에
이르기 힘든 우회로라는 것이다.

나시무라 요시마사 전 일본 대장성 은행국장은 이와 관련,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일을 도모한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금융 위기를 여론의 합의를 통해 해결할 수는 없다"고 일본식 해법의 문제를
자인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