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혁박사, 하납선생, 고가화주임...

독일 바이엘그룹 임원들이 내미는 명함의 한쪽면에는 모두 이런 한자식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배이공사"라는 바이엘의 한자식 표기도 나란히 쓰여 있다.

임원뿐 아니다.

본사에서 근무하는 거의 대부분 직원들은 한자이름을 갖고 있다.

바이엘의 "아시아 드라이브" 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이엘은 최근들어 아시아행 열차의 스피드를 한단계 높였다.

지난주 아시아 지역 기자들을 홍콩으로 불러모아 앞으로 10년간 40억마르크
(약 2조6천억원)를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4대 증권사인 야마이치 증권이 무너지고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이 줄줄이 IMF로 달려가 구호를 요청하는 와중이었다.

그동안의 투자계획을 오히려 하향축소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바이엘의 동방전략 성공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디터 베허 아.태지역 최고책임자는 "아시아는 현재 과도기적 현상을 겪고
있을 뿐이다.

이 시련기를 지나면 아시아 경제는 더욱 단련될 것이다.

아시아시장의 수요가 계속 늘어나리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단언했다.

바이엘이 왜 이런 모험을 하는 것일까.

오는 2010년에는 아시아 지역의 화학제품 수요가 8천6백50억달러에 달할
것(독일의 화학제조업협회 추산)으로 바이엘은 추산하고 있다.

이는 전세계 수요의 30%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러나 현재 바이엘이 전체매출액중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들이는 몫은 14%.

앞으로 10년간 이 비율을 수요에 걸맞게 끌어올리자면 투자를 늘려야 한다
는게 바이엘의 판단이다.

바이엘은 40억마르크 투자계획을 통해 2010년까지 아시아 지역 매출비중을
25%선으로 높일 계획이다.

바이엘의 아시아 전략은 3대 기둥으로 구성돼 있다.

첫 기둥은 첫째, 고객 가까이에서 현지 입맛에 맞는 맞춤식 마케팅서비스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바이엘은 중국 상하이에 기술서비스센터 건립을 추진중이다.

둘째, 아시아의 생산기지화다.

바이엘은 기존 생산시설이외에 중국 대만 태국 인도 등 아시아 곳곳에
공장을 짓거나 생산라인을 늘려 깔고 있다.

셋째, 연구 개발(R&D)의 현지화다.

바이엘은 지난해 아시아지역의 R&D비용으로 1억7천3백만마르크를 썼다.

올해는 2억마르크를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일본 간사이와 유키에 있는 R&D센터이외에 중국에도 R&D기능을 강화할
작정이다.

물론 이같은 아시아전략은 "세계화"라는 커다란 흐름과 맞닿아 있다.

"아시아에 세워지는 공장중 단일 시장용으로 지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바이엘의 공장은 최적의 국제생산기지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차원에서
세워진다"고 바이엘은 강조한다.

단지 해당지역의 수요만을 보고 공장을 짓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가장 값싸고 효율적인 생산처에서 물건을 만들어 전세계에 공급한다는
전략이 아시아 투자의 기초가 되고 있다.

어려운 독일 경제속에서 바이엘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도 바이엘의 이런
앞선 국제화 전략덕분이다.

바이엘의 역사는 국제화와 궤를 같이 한다.

바이엘이 아시아 태평양 시장에 발을 내디딘 것은 1882년.

염료장사로 중국시장에 뛰어든 바이엘은 일본 인도 등 아시아와 전세계
각국으로 빠르게 사업을 확대했다.

국제화의 선두주자였던 셈이다.

바이엘은 올들어 9월까지 3분기동안 전년동기대비 13% 늘어난 4백13억
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

신기록이다.

마진율(매출액 대비 수익률)도 10%대를 기록하고 있다.

고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 북미지역과 아시아지역에서 많은 수확을
거뒀다.

일부에서는 바이엘의 이번 아시아 투자전략을 "위험한 도박"으로 평가한다.

아시아경제가 위기를 겪으면서 화학제품 수요도 바이엘의 기대만큼 늘어
나지 않으리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위기는 항상 기회를 동반한다.

바이엘은 지금이 아시아시장을 선점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바이엘의 아시아 전략이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나 바이엘의 공격적인 투자에는 한국기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류
기업다운 면모가 있다.

"탄탄한 재무구조"가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엘의 자기자본 비율은 42.58%이다.

바이엘이 한햇동안 이자 등 금융비용으로 쓰는 돈도 6억1천1백만마르크.

매출의 1%선이다.

"적극적인 사업확대"도 "보수적인 재무관리"라는 테두리를 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후진기업의 "무모한 경영"과 일류기업의 "공격경영"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아닐까.

< 홍콩 = 노혜령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