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가 전세계를 향해 주창해온 "글로벌 무역자유화"가 내부
걸림돌에 채였다.

3년만의 부활을 꾀해 온 통상교섭 신속처리권한(패스트 트랙)법안이 하원의
관문에 걸렸기 때문이다.

클린턴 행정부와 하원 지도부는 당초 패스트 트랙을 지난 7일 본회의
표결에 붙여 확정짓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표결이 계속 미뤄진 끝에 이번 주중으로 연기됐다.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 의원들 대다수가 강력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다.

패스트 트랙이 하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4백34명의 의원중 과반수인
2백18명의 지지표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안을 지지하는 의원은 공화당 소속 1백60여명, 민주당 40여명
으로 2백명을 간신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40명 가량이 찬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표"로 간주되고 있다.

백악관측은 지난 주말동안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 공략을 폈지만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텃밭인 노동계의 반대 로비가 워낙 거세기 때문이다.

미국 의원들에게 당론보다 더 중요한게 지역구 여론이다.

패스트 트랙에 적극 찬동하고 있는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 등 공화당
지도부는 일단 이번 주말까지 하원 표결을 계속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백악관 일각에서는 아예 주말까지 철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통령이 제출한 핵심법안이 집권당 의원들의 반대로 기각되는 "치욕"을
면치 위한 마지막 고육지책이다.

행정부가 외국과 체결한 무역관련 협정에 대해 의회는 일절 수정을 못하며
다만 가부만을 결정할 수 있다는게 이 법안의 골자다.

노동계와 민주당이 이에 반대하는 이유는 "일자리"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패스트 트랙으로 무역자유화가 확대될 경우 저임 노동력이 풍부하고 환경
규제가 느슨한 개도국들의 대미 상품수출이 확대될 것이란 우려다.

백악관측은 무역자유화에 따르는 수입 확대보다는 수출 증대가 더 클
것이라는 논리로 의원들을 계속 설득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가 패스트 트랙으로 무장돼 있어야
앞에 산적해 있는 각종 대외 통상현안을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패스트 트랙이 수포로 돌아갈 경우 당장 이달말 캐나다의 뱅쿠버에서 열릴
아.태경제협력체(APEC) 연례회의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가 문제다.

미국은 이 회의에서 한국도 포함한 18개 회원국간에 40여개 품목의 관세
인하 합의를 이끌어 낼 예정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패스트 트랙과 같은 강력한 추진장치를 못갖춘 상태
에서는 그같은 합의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뿐만 아니다.

클린턴 행정부가 내년 4월을 목표로 추진해온 칠레의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가입 등 남북미 무역자유화 확대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 농산물 시장 추가개방을 밀어붙이기도 버거워질게 분명하다.

WTO(세계무역기구)에서도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란 우려가 높다.

그러나 패스트 트랙이 없다고 해도 한미 관계 등 양자간 통상현안 처리방향
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쌍무적인 통상문제는 기존법률의 테두리 내에서 얼마든지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슈퍼 301조 같은 것은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클린턴의 야심은 쌍무적인 통상현안 몇가지에서 성과를 얻어내는
따위에 안주하지 않는다.

지난 3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관세인하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이래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이 주요 통상관련 법안을 놓고 의회에 패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만약 패스트 트랙이 백악관의 "패배"로 결말지어진다면 클린턴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기는 셈이 된다.

이래저래 세계의 눈은 이번주 내내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쏠려
있을 것 같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