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15전대)에서 차오스(교석) 상무위원이
실각한 것은 당내 서열 3위이면서 공안 무장경찰 사법기관등 권력기관
실력자의 정치무대 퇴장인 동시에 장쩌민(강택민) 당총서기 체제의 공고화를
의미한다.

또 개혁개방의 "중도파"인 차오스의 실각으로 장총서기가 15전대 정치보고
에서 밝힌 국유기업 개혁과 사유제 확산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차오스실각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가 장총서기의 최대
라이벌이기 때문.

차오스는 정보기관을 포함한 중국 공안을 장악하고 있었고 무장경찰
검찰원 사법기관 등을 20여년 이상 통괄, 곳곳에 자신의 인맥을 구축해
왔었다.

외교 소식통들은 폐막식 하루전까지도 "차오스가 실각될리 없다"고 예상할
정도였다.

이런 차오스는 지난89년 천안문 사태 당시에도 10여명의 중앙 최고실력자들
이 강경진압을 주장할때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 덩샤오핑(등소평)-장쩌민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자파의 세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차오스의 실각으로 장총서기는 국유기업 개혁과 소유제 제도의 변화등에서
예전보다 강한 추진력을 얻을 것이라는게 중국 외교가의 분석이다.

그동안 장총서기는 중도파나 강경파의 눈치를 보느라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자본주의 제도의 본격 도입에 극도로 조심스러웠었다.

장총서기의 최대 라이벌이자 경제정착 실시때 "감안"해야 할 대상이 물러난
것이다.

이젠 명실상부한 장쩌민 체제가 열렸다.

덩샤오핑이 장쩌민-리펑(이붕)-차오스의 3두체제를 만든지 10여년만에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개방"이 브레이크없이 달릴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때문에 15전대 개막식에서의 장쩌민총서기의 정치보고에 더욱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장총서기는 사회주의체제 고수를 전제로 한것이지만 자본주의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국유기업을 개혁할때 당과 행정기관의 무능력자까지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부실 국유기업의 경영효율 향상과 자본조달을 위해 전략적인 국유기업을
제외하고는 주식제를 도입한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차오스의 실각으로 장총서기가 제시한 이들 경제분야의 개혁과제들이 힘을
얻어 실천에 옮겨질 것이라는게 외교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나아가 최대라이벌이 제거됨으로써 정치 경제분야의 "이견"이 해소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베이징=김영근특파원 >

[ 실각한 교석 누구인가 ]

당 공식서열 3위였던 차오스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73)은 그동안 서열
2위인 리펑총리를 제치고 장쩌민국가주석의 최대 라이벌로 손꼽혀 왔다.

당기밀을 관장하는 중앙조직부장과 중앙판공청 주임 등 정보계통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는 전국의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도적
인물로서 보수파와 개혁파 양쪽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아왔기 때문.

차오스는 경력면에서도 장국가주석과 리총리를 단연 압도해 왔다.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49년까지 상하이에서 학생운동을 지도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상하이교통대학 졸업생이던 장국가주석도 차오스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차오스는 장쩌민, 리펑 등 대부분 신세대지도자들이 "혁명열사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덕을 본 것과 대조적으로 일찌기 16살에 공산당에
입당해 1949년 공산정권수립까지 줄곧 백구(국민당점령지역)에서 비밀공작에
종사하면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차오스는 또 치밀한 정세판단으로 89년 천안문사태당시 정치국의 무력진압
결정과정에서 교묘하게 발을 빼 천안문사태에 대한 정치적 부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보통답게 뿔테안경을 낀 차오스는 새벽 6시정각에 기상하며 술, 담배를
전혀 안하는 "기계"같은 절제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김수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