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저녁7시 도쿄시내 우치사이와이초(내행정)의 다이이치칸교은행
(제일권업은행) 본점.

시중행 가운데 최연소인 54세의 스기다 가즈유키 신임행장이 기자들 앞에
섰다.

"그렇게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한 색깔을 부정할수 없습니다"

총회꾼들과의 접촉여부등을 캐묻는 기자들의 칼날을 이런식으로 피해
나갔다.

총회꾼 관련 비리를 사죄하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것이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몸을 바쳐 소임을 다할 각오다. 오늘을 새로운
창업일로 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끝부분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최종적인 조사결과를 토대로 사건관련자들을 엄정하게 처분하겠다"고
말했을때는 마른 침을 삼키기까지 했다.

폭풍우속에서 이뤄진 스기다호의 출범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회사 바깥쪽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스기다행장의 회견이 있기 몇시간전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참의원 대장
위원회에 참석, "다이이치칸교은행이 복권을 독점 판매하는게 바람직한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독점판매제를 바꾸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다이이치의 새로운 출발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꼴이 되고만 셈이었다.

다이이치의 총회꾼 파문은 이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무더기 구속에도 불구하고 불씨가 여전히 살아 남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산넘어 산"인 꼴이다.

개인고객의 예금이탈현상이 바로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5월중에만 개인예금 1천4백93억엔이 빠져 나갔다.

이 때문에 개인예금잔고에서 줄곧 유지해온 2위 자리를 도쿄미쓰비시은행에
넘겨주고 말았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같은 사태가 계속될 것이라는데 있다.

다이이치의 "크린" 이미지를 믿고 "하트마크"(로고)를 찾았던 고객들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판 빅뱅의 주전장이 될 1천2백조엔규모의 개인자산유치에서 큰
타격을 입을게 뻔하다.

고객이탈현상은 지방자치단체로까지 번지고 있다.

도치기현은 40억엔의 예금을 해약했다.

야마가타현도 예금 22억엔을 빼내갔다.

타은행들이 다이이치의 멤버및 준멤버인 중견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거래은행교체 상담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익의 원천인 거래기업의 이탈은 다이이치칸교은행에 "보디블로"를 먹이는
결과가 될수 있을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자산운용에서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받게될 조짐이다.

다이이치가 자산운용을 강화하기 위해 10월을 목표로 추진중인 계열
다이이치칸교투자고문과 그룹의 간카쿠투자고문, 아사히투신위탁 등 3사간
합병의 성사여부도 불투명해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후지다 이치로(58) 부행장이 13일 총회꾼에게 우회융자
를 승인해 준 혐의로 도쿄지검특수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현직수뇌부로까지 불똥이 튈 조짐인 것이다.

대장성에서는 다이이치에 행정처분을 내릴 것을 검토중이다.

일부은행에서는 다이이치가 독점하고 있는 복권사업을 담당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같은 난국을 의식, 다이이치도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총회꾼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해 총무부를 폐지할 계획이다.

총회꾼사고 재발을 막기위해 업무감사위원회도 신설한다.

변호사 회계사등을 영입, 경영진을 체크하고 심사부문적정성도 평가할
방침이다.

구다이이치은행과 일본칸교은행 출신들이 번갈아 가면서 포스트에
기용돼온 "멜빵걸이식" 인사도 없앨 예정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써 총회꾼에 질질 끌려다닐 정도로 나약했던 경영력이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금융빅뱅이 초읽기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총회꾼들과의 검은
커넥션의 파문은 앞으로 계속될것 같다.

< 도쿄=김경식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