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어디서나 "먹혀 들어가는" 얘기의 소재가 된 벤처기업.

그 벤처기업을 사람들은 대개 미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연 실리콘밸리는 연구대상이 된다.

반면 일본은 벤처정신이 부족해 밀린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해 버린다면 오늘날 굴지의 기업으로 커버린 소니
혼다의 성장사를 설명할 수없다.

교세라 또한 마찬가지다.

경주에 비유되는 일본의 고도 교토에서 "창고기업"으로 일어선 기업이다.

교세라의 창업주인 이나모리 가즈오는 일본에서 "벤처기업의 원조"로
통한다.

자신과 같은 젊은 경영자들을 발굴하기 위해 설립한 모리와주쿠
란재단을 통해서 일본벤처기업의 상징인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
사장도 길러졌다.

이나모리는 씨없는 수박을 만든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넷째사위이기도
하다.

이나모리는 최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최근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불문에 들어가겠다.

교세라와 제2전신전화(DDI)에서는 명예회장같은 한직에 머물겠다.

인생이 이제 얼마남지 않았으니 내면의 세계를 좀더 충실히 하고 싶다"

그의 발언은 일본내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과거 강렬한 인상을 갖게 하는 독특한 경영철학과 지도력으로 교세라를
키우고 DDI를 안착시켰던 신화적인 경영인이 이나모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물러날 때와 그 방식에 대해 오래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명예회장이란 직함이지만 그룹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이나모리일
수밖에 없다.

그는 교세라그룹의 각부문을 실력있는 전문경영인들의 집단지도체제에
위임하고 스스로는 정신적인 심벌로만 남는 은퇴의 미학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본남부의 가고시마에서 태어나 중학교 입시를 두번이나 실패하고
대학교마저 떨어졌다.

어려서는 결핵으로 병상에 드러누워 있어야 했으며 회사창업이후에도
얼마간은 대차대조표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제로"에서 시작한 사나이였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 파인세라믹이란 기술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자업체들이 브라운관을 만들면서 세라믹이 필요해졌으나 일본에서
공급할 회사가 없다보니 우리제품을 받아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회고는 겸손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후 기술개발에 있어서도 그는 좋은 인재를 끌어모을 수없었다.

취업난시대에 지명도가 없다보니 기술이 출중한 대졸자들은 교세라를
찾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창조성이 넘치는 사풍을 유지한다는 생각이었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제품을 남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내야만
회사가 살 수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교세라는 안보이는 분야에서 사실상의 독점상태를 차지할 수있었다.

자동차의 경우 배기가스를 분사시키는데 필요한 히터의 세라믹소재를
전세계 자동차업체에 공급한다.

그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아메바경영에 대해 개개인이 삶의 보람, 일의
보람을 느끼면서 경영에 관심과 책임을 가질 수있도록 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라고 말한다.

경영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구미방식의 자본주의가
효율이 높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업무를 시키고 시킴을 받는 관계에서는 보람, 그것을 향유하면서
나올 수있는 독창성이 무너질 것이란 우려를 얘기한 것이다.

과연 "사회에 공헌할 길을 찾겠다"는 불교입문의 변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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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32년1월 가고시마 출생
<> 55년3월 가고시마대학 공학부졸업
<> 59년4월 교토세라믹(현 교세라)설립
<> 66년5월 사장 85년6월 회장취임
<> 84년6월 DDI설립 회장취임
<> 95년1월 교토상공회의소장, 일본상공회의소 부회장취임
<> 96년9월 기자회견에서 ''불교입문''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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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