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은 1904년 8월22일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선성, 학명은 희현.

일찍이 모친 담씨를 잃고 계모 하씨 손에 큰 등은 애국심이 남달랐다.

1919년 중경의 프랑스고학예비학교에 입학한 등은 5.4운동후 일본상품배척
운동에도 가담하는등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 갔다.

중국의 학문세계는 그러나 등에게는 너무 좁았다.

보다 넓은 세계가 필요했다.

1920년 10월 등은 프랑스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프랑스는 1차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어려운 유학생활을 견뎌야
했다.

철강공장의 잡역부 화차인부 식당종업원등 닥치는 대로 일해 학비를 조달
했다.

세상을 보려던 꿈은 한낱 몽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무서운 기세로 유럽대륙을 뒤덮던
사회주의사상은 무일푼의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조세염 주은래등 선배들의 뒤를 따라 사회주의사상에 몰두하는 한편 각종
정치선전활동에도 뛰어들었다.

1922년 재구중국소년공산당에 참가하고 1924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 리옹지구에서 중국인노동자운동을 이끌었다.

16~21세까지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등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리매겼다.

1926년초 등은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소련유학길에 올랐다.

동방대학과 중산대학을 거쳤다.

소련생활은 1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당시 중국서북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옥상의 요구를 받아들여 20여명의
동료와 함께 이듬해 봄 귀향했다.

등은 국공합작 분열직전의 혼란속에서 중산군정학교의 정치처장겸
정치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정세변화에 따라 곧바로 중국공산당의 소재지였던 무한으로
옮겨 당비서직무를 맡게 됐다.

그러나 1927년4월 장개석의 상해혁명으로 1차국공합작은 완전 결렬됐고
장의 대대적인 북벌로 인해 공산당활동은 자연히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소평은 이시절 지하활동중 쓰게된 이름이다.

1927년 8월 중국공산당은 무한에서 긴급회의를 소집,일련의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등은 이 계획에 따라 활동에 돌입했다.

남령에서 빈이란 이름으로 혁명역량을 닦은 등은 1929년 10월 중국공산당
광서전적위원회서기로 임명됐으며 12월 중국노농홍군 제7군단과
우강소비에트정부를 창건했다.

이듬해 2월에는 용주봉기를 일으켜 홍군 제8군단과 좌강소비에트정부를
창건, 7,8군단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여름 등은 강서성 남부와 복건성서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혁명근거지
로 활동기지를 옮겼다.

1931년 11월은 중국공산당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 시기이다.

각 혁명기지 대표들이 강서성 서금에서 제1차 전국공농병대표대회를 열고
모택동을 주석, 주덕을 홍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앙공농민주정부(중화
소비에트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창당이래 처음으로 1백80개현과 9백여만명의 인구
를 통치하는 정부로서 당의 정책과 공산주의이론을 실험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던 것이다.

1934년10월 제5차 반토벌작전 실패로 홍군은 대장정길에 올라야 했다.

홍군 1군단 정치부선전부장이었던 등은 섬서성에서의 동진이 끝난뒤 항일
전쟁이 폭발될때까지 1군단 정치부 부주임, 주임으로 일했다.

1937년 일본이 전선을 확대하면서 2차국공합작이 맺어졌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개편돼 항일전선에 투입됐다.

등은 유백승이 사단장인 129사단 정치위원에 임명됐다.

등은 이 부대를 이끌고 산서 하북 하남에 걸친 항일투쟁근거지를 확보
했으며 산동성으로 무력투쟁의 근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1945년 종전직후 장개석과 모택동사이에 회담이 열려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국민당 2중전회에서 반공방침이 가결
되면서 46년 6월 전국이 냉전에 휩싸였다.

등은 정도, 거야등의 대규모 전투를 치렀으며 산동서남지구를 장악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따라 48년5월 중원국 제1서기, 중원군구 정치위원이 됐다.

1948년초부터 등의 부대를 주축으로 중공군은 본격적인 공격을 단행, 이해
11월 만주전체를 점령하고 1949년 1월 북경과 천진을 함락시켰다.

같은해 9월 중화인민정치협상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된 모택동은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정식 선포한다.

1952년 7월 등은 중앙으로 소환돼 혁명으로 일관된 생애에 전환점을 맞았다.

정무원 부총리겸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및 재정부장을 겸임했다.

1954년에는 공산당 비서장 조직부장, 그리고 국무원부총리 국무위원회
부주석을 겸임했다.

1955년 7월 제7기 5중전회에서 등은 정치국위원으로 피선됐으며 다음해
9월 8기1중전회에서 정치국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돼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 진운등과 더불어 중국의 중요지도자로서 국가건설에
주력했다.

그러나 모택동의 대약진운동 실패에 의해 촉발된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등은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혀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채 강서성으로
추방됐다.

임표가 반모쿠데타에 실패, 사망하면서 등은 주은래의 노력으로 국무원
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 총참모장을 거쳐 1975년 1월에는 당의
제1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이란 요직을 맡았다.

등의 재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모택동의 비호아래 급속히 정치세력을 확대해온 강청을 중심으로한
4인방에 의해 정치보다는 경제, 이념보다는 전문지식을 중시하는 수정주의자
로 또다시 낙인찍혔다.

1976년 주은래의 사망으로 권력내부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천안문사건
(4.5운동)이 발생,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등은 당적만 유지한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그해 9월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주은래의 뒤를 이은 화국봉은
당원로의 지지를 얻어 4인방을 제거하며 경제우위의 실용주의노선을 분명히
했다.

등은 1977년 7월의 제10기 3중전회에서 당부주석, 국무원부총리,
인민해방군총참모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문화혁명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고 화.등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화국봉은 1978년 2월 제11기 2중전회에서 10개년 경제개발계획의 개요를
확정하고 의욕적인 경제건설을 추진했다.

50년대 대약진운동과 구별해 양약진운동이라 불린 이 경제건설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화국봉을 비롯 온건 문혁파와 주은래노선을 이어받은 등을
정점으로한 실무파사이의 대립이 정치적 대립으로 격화됐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계속혁명"을 옹호했고 4인방의 비리를 폭로하면서도
문혁의 성과와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등은 모든 진리는 사실과 실천에 의해 검증돼야 한다는
실사구시논쟁을 전개하고 이것이야말로 모사상의 진수라는 주장과 함께
문혁파의 개인숭배와 교조주의를 공격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검증되고
발전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화국봉을 제거하기 위한 등의 계획은 착실히 진행, 1978년 11월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승리를 확고히 했다.

그해 12월 11기 3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의 현대화와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기본방침을 채택함으로써 등노선이 확정됐다.

또 호요방 왕진 조자양등 측근을 정치국원으로 승진시켰다.

현대화건설의 방향을 정확히 하기 위해 등은 1979년 3월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인민민주주의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견지, 공산당지도의 견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 견지등 4개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1980년 8월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승인으로 심천 주해 산두 하문등 4개의
경제특구가 공식 탄생했다.

등은 1981년 6월 11기 6중전회에서는 화국봉을 총리직에서 면직시킴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982년 9월 제12기전인대에서는 사회주의 현대화와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당규약이 새로 제정되고 총서기제를 부활, 호요방이
총서기, 조자양이 총리에 취임, 당정의 모든 요직에 측근을 포진시켰다.

이로써 중국은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을 포기하고 혁명보다 경제건설에
치중하는 실용주의 노선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등은 천안문사태이후 건강악화와 후계자양성을 위해 1989년 11월 13기
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그해 6월 총서기에 선출된 강택민
에게 넘겨줬다.

1990년 3월 7기 전인대 3차회의에서는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사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등은 지난 1992년 1월 남순강화시 자신의 개혁.개방노선의 가속화를
촉구하는등 12억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국가건설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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