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사특약 독점전재 ]

아시아를 가장 오랫동안 깊숙이 경험해온 서양인은 홍콩의 영국 총독일
것이다.

크리스 패튼은 마지막 총독이다.

그는 영국의 1세기에 걸친 이 지역에 대한 개입을 공식적으로 마무리 짓는
대사를 치러내고 있다.

크리스 패튼이 지금 아시아에 대해 갖는 감회는 분명히 역사적 의미가
있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서양인의 입장에서 아시아를 평가하지 않고 있다.

지난 한세기 동과 서의 동거를 체험해온 홍콩인의 눈으로 아시아의 어제
오늘 내일에 대해 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얘기하고 잇다.

패튼총독은 최근 영 이코노미스트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아시아의
고도성장은 하늘이 내린 기적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아시아인들이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자유뮤역을 지향한데 따라
얻은 과실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 아시아의 앞날에 세계 경제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예언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패튼총독의 기고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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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륙의 경제상황을 내다보는 연구 분석도 유행을 타는 것 같다.

몇달전만해도 아시아 경제 얘기만 나오면 기적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아시아지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두고 도미노
(domino)가 다이나모(dynamo)로 바뀌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한 지역이 공산화되면 인접지역도 적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은 사라지고
연쇄적으로 다이내믹한 경제발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캄보디아 공산화의 진원지였던 베트남에 서방 자본가들의 투자가 몰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좋은 얘기도 반복해 들으면 싫증이 나는지 아시아 경제에 대한
낙관론이 최근 비관론으로 돌변했다.

수출시장인 구미에서 아시아제품 수입수요가 감퇴하고 아시아 전자관련
산업이 구조적인 공급과잉양상을 드러내자 아시아 경제가 침체의 징후를
보였다.

이를 신호로 장미빛 전망을 내세웠던 사람들이 불길한 예언자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아시아대륙은 경제적으로 그리 괄목한 만한 성공을 이룩했다고
평가할 수 없으며 혹독한 시련기로 접어들었다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몇개월만에 극단적인 낙관론이 비관론으로 돌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판단 기준을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정말 경제기적이라는 것이 실존했는지 여부를 생각하게 만드는
원초적인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자연히 아시아대륙의 미래를 점치는 분석작업이 한층 더 복잡하게 됐다.

여기서 아시아에서 경제기적이 일어났는가를 먼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답은 고도성장은 분명히 있었지만 기적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시작해 홍콩 싱가포르 한국 대만등으로, 다음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등지로, 현재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이
이뤄지고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도 찾아 낼 수 있다.

물론 아시아권의 경제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에 앞서 대성장의 역사를 경험했다.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우주인 얘기같이 신비하게 풀이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또 아시아의 경제기적이라고 말해왔지만 이 "아시아"라는 것이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아시아는 인구 30억명에 수백의 인종이 수백가지의 언어와 문화로 살고
있는 대륙이다.

경제성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나라는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미얀마와 북한도 아시아이지만 경제기적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나라다.

아시아인 특유의 가치관을 아시아경제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핵심 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시아 지도자들사이에는 "무책임한" 언론의 비판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야당의 목소리가 작을수록 경제개발에 유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서구의 진보주의는 무책임한 개인주의만 양산한다며 정치적인 제한을
가하는 아시아 지도자들이 속출했었다.

그렇지만 인권은 보편타당성을 지닌 것이다.

아시아라고 사각지대로 남아 있어야된다는 법은 없다.

시위진압봉이 아시아에서 휘둘러졌다고 상처가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아시아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성장과 시장개방이 진행될
수록 개방된 정부가 절대로 필요한 시대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아시아경제의 고도성장이 불가사의한 기적의 소산도 아니고 아시아
특유의 가치관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면 경제성장을 이끈 원동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이 질문에대해 먼저 아시아인들에게는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이 철저하다는
점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대답해 줄 수 있다.

40년전의 홍콩과 45년대의 싱가포르에 이어 오늘날에는 태국 북부와
필리핀 마닐라의 달동네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불태우고 있다.

다소 고지식해 보이는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아시아의 경제개발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시아국가들이 시장경제 체제를 지향해왔다는 점이 이 지역에
성장의 동력을 제공했다.

홍콩에서는 주택문제해결을 위해 정부가 직접 개입했고 일본도 스스로
행정규제목록을 만들어 놓고 해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아시아가
애덤 스미스의 자유경제체제를 완벽하게 도입하지 않은 점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몇가지 특수한 예외만 인정해주면 아시아권 경제는 전반적으로
자유시장경제를 토대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대외 자유무역도 아시아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는 구미와의 자유무역으로 컸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보호주의가 활개를 치면 아시아 경제는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아시아의 앞날이 밝으면 지구촌 나머지 지역의 미래도 밝아진다.

아시아 노동자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날수록 그만큼 지구촌 경제의
동력이 힘차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현재는 세계가 WTO(세계무역기구)의 자유무역 우산아래 놓여있다.

보호주의라는 것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무역의
가면을 쓴 보호주의도 존재하는 시기이다.

지구촌에서는 지금 정보통신및 정부조달시장개방등을 둘러싸고 국가 또는
대륙간에 중요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또 국제적인 인권보장 확대라는 정치이슈도 제기돼 있다.

국제사회는 통상문제와 정치문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그것도
의욕적으로 잡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최근 몇년사이에 일어난 경제성장을 단순한 기적이
아닌 현실로 인식하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아시아의 정치와 경제를
판단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구및 도시문제와 불안한 정국같은
문제점들도 아시아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믿어도 무방하다.

아시아에서 좋은 소식은 전세계의 굿 뉴스(good news)라는 생각으로
이 대륙의 앞날을 지켜볼 일이다.

"Beyond the myths, 4th January, Economist"

< 정리 = 양홍모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