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석유, 자동차와 엔진, 반도체와 디지털.

뗄수 없는 한몸으로 20세기를 이끈 기술이다.

금세기 산업계를 지배해온 이 등식관계가 21세기 문턱에서 파괴되기 시작
했다.

천연가스에서 가솔린을 뽑아내는 꿈의 기술, 사용연료를 30% 이상 줄이는
새 연소방법, 수소전지로 움직이는 무엔진자동차의 탄생, 디지털시대에
도전하는 아날로그 반도체의 반란...

모두가 차세대 시장 제패를 겨냥한 미래기술이다.

일본의 유력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최신호는 ''신세기 기술의 개막''
이란 특집기사를 통해 세계 산업계를 뒤흔들 21세기 신기술을 소개했다.

그 내용을 요약, 4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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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동부 사라와크에 우뚝 솟은 한 공장.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정유공장이다.

생산품도 가솔린 경유 등유등 어느 정유공장에서나 볼수 있는 흔한 제품
이다.

그러나 생산과정을 들여다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이 공장의 정유원료는 원유가 아닌 천연가스.

기체인 가스를 상온상태에서 그대로 액체인 가솔린으로 변환시키는 "마술"
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신기술을 개발한 주인공은 석유메이저중에서도 첫손 꼽히는 영국
네덜란드 합작업체 로열더치셸.

지난 93년부터 말레이시아 공장이 가동에 들어가 하루 1만2천5백배럴의
석유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 2위의 석유메이저 미국 엑슨도 한발 뒤에서 "셸 추격전"이 한창이다.

그러나 아직은 시험생산단계.

카타르에 공장설립을 준비중이지만 본격적인 생산시기는 미정이다.

미국 모빌도 천연가스에서 가솔린을 추출해내는 기술을 연구해 왔지만
지금은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다.

"비용"이라는 벽에 부딪쳐서다.

모빌이 천연가스에서 가솔린을 뽑아내는데 드는 비용은 리터당 26센트.

석유에서 정제하는 비용의 2배에 달한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섣불리 셸의 기술에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엄청난 생산원가 때문이다.

지난 73년과 79년 석유쇼크가 전세계를 휩쓸고 나자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에너지자원의 "탈석유화"를 내걸고 일제히 에너지기술 개발 연구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두 코스트의 벽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후 대부분의 기업들이 저유가시대에 안주하면서 기술개발을 등한시하는
동안 셸은 연구를 계속했다.

덕분에 셸은 "고비용"이란 장애를 넘었다.

"유가가 배럴당 20~23달러정도만 유지되면 가격경쟁력이 있다"
(셸기술연구센터 프로젝트 매니저 알랜드 호크)고 장담할 정도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포스트 석유시대"의 에너지 패자티켓을 예약했다는
점이다.

고성장과 함께 에너지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아시아, 환경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선진국.

천연가스 변환 가솔린을 무기로 셸은 이 양대시장을 장악할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전문기관등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이후 아시아의 석유제품 수요는 연평균
4.5%씩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공장을 말레이시아에 세운 것도 아시아 석유제품 수요를 천연가스 변환
가솔린으로 잡겠다는 야심찬 포석이다.

미국과 유럽등 선진국 에너지 시장도 환경규제 강화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텍사코 셰브론등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8개 석유회사는 주법이 정한
청정연료 기준에 맞추기 위해 오는 2000년까지 총 45억달러의 설비경신비를
투자해야 할 처지다.

그러나 셸은 느긋하다.

천연가스에서 나온 가솔린은 환경과 인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유황과 벤젠
함유율이 극히 적다.

따라서 기존 가솔린에 천연가스 변환 가솔린을 적당히 섞기만 하면 이
기준에 맞출수 있다.

셸의 천연가스 변환 가솔린이 바꿔놓을 업계 변화를 일본 에너지연구소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앞으로 10년정도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병존할 것이다. 그러나 30년후에는
석유에서 천연가스로 에너지 주도권이 옮겨간다. 그때 다른 석유회사들도
천연가스 변환 가솔린의 상업생산에 뛰어들겠지만 코스트 절감에서 멀찌
감치 앞서버린 셸을 따라잡기는 힘들다. 더욱이 셸은 이 분야의 기술특허를
갖고 있어 시장점유율 확보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셸이 천연가스 변환 가솔린 기술개발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말레이시아 공장 건설비만도 일반 액화천연가스(LNG)공장의 6배(총
8억5천만달러)에 달했다는 점에 비춰 "엄청난" 액수를 투자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다른 업체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 동안 셸은 "미래"에 투자했다.

"에너지시장 집권 장기화"가 바로 그 대가다.

< 노혜령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6일자).